후에 시티투어, 10년 전과 달라진 점

굿모닝 베트남
 

 
새벽 5시쯤 되었을까. 아직 창밖은 어두운데 1층 주방은 식사 준비 소리인 듯 분주했다. 혹시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에어비앤비 손님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시는 건가? 아무리 조식 제공이라지만 설마.
 
설마는 역시였다. 약속된 7시에 주방에 내려가니 생각지도 못한 푸짐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스튜에, 볶음국수에, 계란말이에, 갖가지 열대 과일까지. 말 그대로 정성스러운 베트남 가정식이었다. 아무리 돈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하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자신의 집을 찾은 손님에 대해 정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자는 ‘情’을 마치 우리들만의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심한 착각일 뿐이다.
 
맛있게 아침식사를 먹은 뒤 나들이 준비를 하는데 창밖으로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친숙한 그런 느낌. 도대체 뭐지? 창밖을 내다보니 그것은 숙소 앞 유치원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였다. 당연히 처음 들어보는 베트남 노래였지만 왠지 낯익었던 건 그것이 바로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등원할 때 트는 노래이기 때문이었다. 경쾌하고 희망찬. 그래, 어느 국가든 비슷한 느낌의 음악이겠지.
 

  

 
아이들 대부분은 부모들이 오토바이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이는 어제 후에에 도착했을 때도 보았던, 하교시간에 맞춰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초등학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습과도 일맥상통하고 있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아이들을 태운 오토바이가 일제히 거리로 쏟아지는 장관이란.
 
그것이 베트남 부모들의 교육열이 대단해서인지, 아니면 워낙 길이 위험해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풍경만으로도 베트남이 젊은 나라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실제로 베트남은 베트남전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 현재 노인이 많이 없는 나라이기도 했다. 평균 연령이 30세라고 하니 사회가 당연히 젊을 수밖에. 우리보다 후진국임에도 불구하고 와이파이가 시내 어디서도 잘 터지는 것을 보면 그만큼 사회가 젊은이 중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후에의 황궁과 사찰
 
숙소에서 나와 약속된 장소에서 버스를 탔다. 그것은 후에를 하루 동안 도는 시티투어 버스였는데, 한국이 아닌 현지에서 계약한 만큼 일행 중 한국인은 우리 가족 밖에 없었다. 즉, 의사소통은 오직 영어와 베트남어로만 가능했다. 하. 오랜만에 하는 영어 듣기평가라. 그렇다고 아이들 앞에서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법. 열심히 듣고 유추할 수밖에.
 
시티투어의 첫 번째 목적지는 후에 여행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후에 황궁이었다. 후에는 베트남의 전근대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의 마지막 수도로서, 도시 한 가운데에 황제가 거처하던 황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여행은 그곳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황궁은 규모가 컸고 화려했다. 물론 중국의 자금성만큼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왕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규모였다. 해자를 건너야 했고, 몇 겹의 문을 지나야만 했으며, 문마다 편액들이 붙어 있었다. 건물들은 유교 풍이었지만 동남아 특유의 색깔을 간직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과거 동아시아 조공무역 시스템에서 조선과 함께 중국의 1등급 신하였지만, 소중화를 추구했던 조선과 달리 자기 동네에서 황제를 자칭했다. 그만큼 중국과 멀었고, 또 힘도 셌다. 어쨌든 칭기즈칸의 몽고를 꺾었고, 세계 최강 미국을 무릎 꿇린 나라이지 않은가. 비록 베트남전으로 황궁은 많이 부서져 있었지만, 남아있는 흔적만으로 그들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궁을 나와 다음으로 간 곳은 후에의 향강(Perfume River)가에 서 있는 티엔무 사원이었다. 입구의 7층 석탑이 유명한 이곳은 응우옌 가문이 베트남의 주인으로 등극하던 시기(1601년)에 지어진 사찰로서 많은 전설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기 전 계시를 받았다는 등의 우리네 사찰과도 비슷했다. 전근대의 권력이 정당성을 챙기기 위해서 이와 같은 전설이나 설화를 이용했던 건 동서고금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사원에는 베트남전 당시 사이공에서 가톨릭 옹호/불교 탄압 정책에 반대하여 분신했던 틱꽝득 스님의 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스님은 그의 분신공양 모습을 찍은 사진이 퓰리처상을 타면서 유명해졌는데, 당시 서구인들은 그 사진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보게 되었고, 베트남 민중들은 남베트남의 폭압적인 실체를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 승려의 죽음이 역사를 바꾼 것이다.
 

 
 

 
그런 틱꽝득 스님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문득 우리의 문수 스님이 떠올랐다. 2010년 4대강 반대를 외치시면서 분신공양했던 문수 스님. 과연 우리 사회는 그의 죽음으로 깨달음을 얻었던가. 아직까지도 4대강 사업을 옹호하면서 썩은 강을 지키겠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이들이 버젓이 활동하는 우리 사회는 1960년대의 베트남보다도 못한 것인가.
 
후에의 황릉
 
사찰을 나와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후에 시내에서 떨어진 응우옌 왕조 황제들의 능으로 향했다. 후에 근처에는 경주나 서울처럼 황제들의 능이 자리 좋은 곳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오늘의 여행은 그 중 대표적인 3곳, 2대 황제 민망, 4대 황제 뜨득, 마지막 황제 카이딘의 황릉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근 4시간 동안 둘러본 세 개의 황릉. 무엇보다 놀란 건 엄청난 규모와 화려함이었다. 말이 능이지, 세 개의 황릉 모두 궁전 혹은 정원과 같은 느낌이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체제였는데 왜 이들의 능은 이렇게 큰 반면, 우리의 왕릉은 아담하고 단출한 것일까? 황릉과 왕릉의 차이었을까?
 

 
혹자들은 조선의 능이 베트남 보다 초라하고 밋밋하다며 실망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만큼 조선이 내적으로 강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조선만큼 지배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체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만큼 권위를 갖기 위해서 무덤을 더 화려하고 거대하게 축조한 것이다. 철학이 빈곤하면 빈곤할수록 세계 최초, 세계 최고를 따지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니던가.
 
세 개의 능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카이딘 황릉이었다. 여타 무덤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카이딘 황릉은 친 프랑스 노선을 택했던 그의 취향대로 유럽의 바로크 양식과 중국, 베트남식이 혼합되어져 만들어졌다고 했다. 마치 유럽의 성당처럼.
 

 
게다가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특이한 색깔이었다. 총천연색을 자랑하고 있는 다른 능과 달리 카이딘 황릉은 외부가 모두 흑백이었다. 당시 신공법이었던 ‘콘크리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필 시멘트 무덤이라. 물론 그때는 그게 최고의 유행이었겠지만 어쨌든 무덤 내부의 화려한 자기들을 보다가 외부의 투박한 시멘트를 보자니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카이딘 황제의 복이려니.
 
승전국의 여유
 
황릉 투어를 마치고 향강 유럼선을 타고 나니 어느덧 하루 일정의 끝이었다. 버스는 차례대로 손님들을 내렸고, 우리 가족 역시 가이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일정을 마무리 했다.

특이한 건 아무도 가이드에게 팁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는데, 어디서나 항상 팁을 줘야했던 10년 전을 떠올리면 그것은 큰 변화였다. 10년 동안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거지? 그만큼 베트남의 모든 서비스가 팁을 포함해서 가격이 오른 걸까?
 
숙소로 돌아가기 전 다음날 다낭까지 가는 기차표를 구매하기 위해 후에역까지 강변을 따라 걸었다. 강변에는 태극기와 베트남기가 함께 있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추측해 보건대 한국이 베트남과의 친선을 위해 강변 데크를 설치했다는 내용인 듯했다. 요즘 박항서 감독 때문에 워낙 한국이 베트남에서 인기가 많으니 벌어지는 일이겠지.
 

 
상전벽해였다. 10년 전 베트남 신혼여행 때 본 충격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전쟁 박물관에 걸려 있는, 대한민국 국군이 베트남 사람들을 학살한 뒤 웃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이제는 태극기와 베트남기가 나란히 걸려있는 모습이라니.
 
그렇다고 베트남 사람들이 베트남전을 잊을 리는 없을 터. 아마도 그들이 우리에게 관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승전국이기 때문이리라. 결국 강자가 약자를 용서해 주는 것 아니겠는가. 베트남이 대미 외교에서 융통성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겠거니.
 
기차표를 끊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은 피자를 먹었지만, 나는 따로 나와 오늘도 쌀국수를 먹었다. 35,000동, 우리 돈으로 약 1,750원. 이 맛있고 저렴한 쌀국수를 한국에서는 10,000원 넘는 금액으로 먹어야 한다니 오호라 통재라.
 
자, 내일은 호이안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