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학교들은 어린이들에게 ‘젠더 공교육’을 한다

*편집자 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배운 성별 고정관념이 훗날 성차별이나 여성혐오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성평등 교육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허프포스트가 직접 다녀온 인도, 스웨덴, 호주의 성평등 교육 현장 이야기를 4주 동안 전합니다.

“십대 아이들에게 신체 접촉에 대해서 ‘좋은 스킨십은 이런 거고, 나쁜 건 이런 거다’ 말하다 보면 ‘아, 나를 사랑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라는 반응이 많아요.”

“가정폭력 사건을 만날 때마다 ‘예방에 더 신경을 썼으면 이렇게 도와야 할 피해자가 훨씬 적을텐데’ 생각하게 돼요. 비만이나 다른 질병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면 예방 캠페인을 열심히 하잖아요? 폭력도 똑같이 봐야죠. 어렸을 때부터 건강한 (가족) 관계에 대해 가르쳐야 해요.”

 

호주에는 ‘젠더 공교육’이 있다

위는 시드니에서 만난 여성 단체 관계자들의 말이다. 한국에서와 비슷하게 ‘불우한 집에서 생기는 일’ 정도로 치부되던 가정폭력 문제가 호주 사회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가 된 건 불과 5년여 전. 

중산층 백인을 포함해, 여러 여성들이 자기가 당한 학대와 폭력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 ‘가정폭력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그 덕분에 가정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가 같이 예방해야 하는 문제’라는 지적도 나올 수 있었다. (▶관련 기사: ‘맞을만해서 때린 거다’라는 말에 호주는 이렇게 대처했다)

2019년 1월 시드니에서 열린 'Women's Wave' 행진 참가자들

예방은 곧 교육을 뜻한다. 발빠른 사람들이 나서서 폭력 예방 교육인 ‘존중하는 관계 교육’(Respectful Relationships Education)을 만들었다. 정규교육과정 첫 학년인 만 5살부터 고교 졸업반인 만 17세까지가 교육 대상이다. 다른 사람을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또 ‘남자는 가장이며 여자는 그런 남자를 따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는 내용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범죄 예방 교육을 하는 것이나, ‘성역할 고정관념을 깨자’는 말이 반발에 부딪히는 건 이곳에서도 흔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피해 여성들이 용기 있게 자기 이야기를 공개하고 나선 덕에, 그리고 ‘미투 운동’이 호주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친 덕에, 늘상 튀어나오던 ‘남녀의 역할은 따로 있다’거나 ‘남자 아이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거냐’는 반발은 크게 줄었다.

“이 교육은 여자아이들뿐 아니라 남자아이들에게도 좋아요. 스스로와 타인을 존중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아주 어릴 때부터 알려줘야 해요.” (폭력예방단체 DVNSW 대표, 무 바울취)

 

한국에서도 성별 고정관념은 가정폭력의 원인이다

가정폭력의 원인을 한국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정부 기관 홈페이지들을 찾아가 봤다. 몇몇 곳에서 “남편의 가부장적인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가해자 남성이 갖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 및 신념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해두고 있었다.

이와 함께 “공격 행동을 허용하는 사회 분위기”, “좌절 상황의 감정해소 창구를 가족에게서 찾는 경우”, “음주 후 행동에 대해 허용적인 사회 문화” 등을 가정폭력의 원인으로 들고 있다. (참고: 통영시, 이천시, 사천시 홈페이지)

호주의 '존중하는 관계 교육'에는 초등학교 취학 전 과정부터 고등학교 12학년까지 전 학년에 각각 나이대에 맞는 과정이 있다.

호주의 젠더 교육도 이런 지적에서 나왔다. ‘아직 어린’ 유치원생, 초등학생들부터 존중과 관계, 고정관념 깨기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의 아이들이, ‘공격적인 행동을 허용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가부장적인 사고를 하는 남편’, ‘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가진 남성’, ‘가족을 감정해소의 창구로 쓰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허프포스트가 교육부·교사 단체 등과 협업해 ‘존중하는 관계 교육’을 개발한 ‘아워 워치’(Our Watch)의 디렉터 카라 글리슨을 지난 6월 호주 멜번에서 만났다. 글리슨은 초등학교에서의 성평등 교육을 하는 데 반발은 없었는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설명했다.

“호주의 15세 이상 여성 3명 중 1명이 물리적 폭력을 경험했고, 5명 중 1명이 성폭력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어요. 폭력 사건은 가난한 집의 불행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에는 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 관계가 반영되어 있다는 지적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죠. 피해자들이 가정폭력 방지 홍보대사로 공개적으로 나서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정폭력 문제가 아주 시급하다는 분위기가 생겼어요. 덕분에 학부모들도 어린이에게 폭력 예방 교육을 해야하는 필요성을 쉽게 수긍한 겁니다.”

'Our Watch' 프랙티스 리더십 디렉터 카라 글리슨

아직 호주 전역에서 이 프로그램을 채택한 건 아니다. 하지만 5년 전 이 프로그램을 처음 기획한 빅토리아주의 모든 학교들이 이 프로그램을 채택 중이며, 다른 주에서도 기존의 ‘일주일에 한 시간 짜리’ 폭력 예방 수업을 ‘존중하는 관계 교육’으로 커리큘럼을 대체해가는 경우가 늘고 있다.

‘존중하는 관계 교육’은 왜 하고 있고, 어떤 내용이며, 무엇이 다른 걸까? 아래는 글리슨의 설명이다.

유아용 책 ”핑크는 남자아이들에게 좋은 색”

1. 젠더 편견은 10살 이전에 뿌리 깊게 자리 잡는다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분홍과 파랑으로 성별 정체성을 부여 받아요. 분홍색 세상에 살든 파란색 세상에 살든 그게 자기 선택이라면 관계 없겠죠. 하지만 어른들은 성별에 따라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하고 또 가르칩니다. 이런 아이들의 행동에는 많은 한계와 제약이 생길 수 밖에 없어요.”

 

2. 성평등 교육 전문가가 아니라, 전문가로부터 교육 받은 담임 교사가 직접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존중하는 관계 교육’의 중요한 첫 번째 특징은 외부 전문 강사를 파견하는 대신, 각 학교의 교사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겁니다. 전문 강사가 훌륭한 인권 강의를 할 수는 있겠지만, 이들이 떠난 후 인권이나 성평등 감수성이 부족한 일반 교사들이 다시 아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교장을 포함해 모든 교사, 모든 교직원들이 책임감을 갖고 성평등 교육의 일부가 된다는 생각으로 참여하도록 했어요. 학교 전체가 변해야 하니까요. 또 아이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상대가 필요할 때 항상 옆에 있는 교사를 찾을 수 있으니 그것도 장점이죠.”

[캠페인 영상: 발레 교실 앞에서 기다리는 아빠에게 ‘딸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었지만, 아빠를 향해 뛰쳐나온 건 남자아이였다.]

 

3. 어린이들에게 성관계와 폭력에 대해 직접 언급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 특징은 우리가 성평등 교육과 폭력 예방 교육을 하지만, 어린이들에게 폭력이나 성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어린이들이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긍정적이고 동등하고 존중이 있는 인간 관계를 맺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거죠.

1990년대에 호주 정부가 전국적으로 피부암 예방 캠페인을 했어요. 그때 6살이었던 전 피부암이 뭔지는 몰랐지만, 어린이도 외우기 쉬운 슬로건을 이용한 캠페인 덕분에 모자를 쓰고 선크림을 발라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죠. 내 나이에 맞게 스스로를 지키는 법, 그리고 미래에 피부암에 걸릴 확률을 줄이는 법을 배운 거예요.

‘존중하는 관계 교육’도 비슷한 접근법을 갖고 있습니다. 외부 강사 대신 초등학생들에게는 초등학교 교사, 고등학생들에게는 고등학교 교사가 가르치도록 한 이유 중 하나도 각 나이대에 맞는 접근법을 각 교실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없애기 위해 어린이들에게 성차별을 하지 말자거나, 폭력을 저지르지 말자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악마라고, 겁을 줄 필요도 없고요.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따로 있지 않다’, ‘(편견에 갇히기보다)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사람이 되자’고 가르치면 됩니다.”

 

4. 남자아이들도 감정적인 능력을 키우면, 폭력 성향이 줄어들 수 있다

‘존중하는 관계 교육’ 자료집은 8가지 주제에 걸쳐 학생들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목표다. 

주제 중 ‘감정 해석’은 폭력 가해 남성들이 가정 안팎에서 겪은 좌절감이나 슬픔을 폭언이나 폭행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주목했다.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 건강한 자기 인식을 갖는 법을 가르치며, 이후에는 좌절감이나 슬픔이 드는 상황에서 적절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도움 구하기’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 모두에 해당할 수 있는 내용이다. 피해자들이 가정폭력을 겪는 상황에서 스스로 먼저 피해 신고를 하는 등 도움을 구한 경우는 3분의 1에 불과했다는 통계 등에 따른 것이다. 가해 남성들 역시 현실의 어려움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폭력적인 행동으로 해소하기 전에 주위에 먼저 도움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시각이 있다. 남성 우울증의 통계 수치는 적은 데 반해 자살률은 높다는 통계 등에 따른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젠더 아이덴티티와 신체 형태가 있으며, 동성부부/한부모/조부모가정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있다고 알려주는 호주의 유아용 책들.

5. 스포츠 분야에서 여성을 대우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아워 워치’는 교사들 외에 언론인과 스포츠 코치들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만들었다. 프로팀은 물론 학교와 동네 동호회 팀에서도 쓸 수 있게 만든 스포츠 코치 가이드라인은 “여성 선수들의 성취를 남성 선수들의 성취와 동등하게 인정하자”는 것이 기본 주제다. 글리슨을 비롯한 전문가들은 스포츠 분야에서 여성의 대우가 바뀌는 것 역시 사회의 성차별 인식 변화와 밀접하게 연동된다고 본다.

“2019년 여자 월드컵은 호주팀 뿐만 아니라 모든 경기가 TV에서 중계됐어요. 어린 조카가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신나게 응원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죠. 물론 조카는 이해하지 못 하겠지만, 지금 여자 월드컵 경기들이 남자 월드컵처럼 똑같이 TV에 나온다는 사실이, 미래에 조카 또래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 더 안전한 미래를 주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6. 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왜 그렇게 늦게 나다녀?’, ‘왜 그런 옷을 입고 나다녀?’, ‘왜 그 자리를 당장 떠나지 않은 거야?’라며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비난하지 마세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여성에 대한 편견이라고 지적하세요. ‘왜 이혼하지 않는 거야?’라는 사람에게, 경제권을 빼앗겨 당장 떠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려주세요. 조카, 혹은 아는 어린 아이가 있다면 여성 선수들의 운동 경기를 함께 보러 가세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옷을 사줄 때는 디자인과 색깔을 한 번 더 생각하세요. 애인, 친구, 직장 동료, 카페나 가게 점원을 대할 때 항상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주세요. 사회의 누구나 초기 예방을 할 수 있습니다.”

 

7. 이 교육은 ‘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시민들이 문제에 대해 인식을 갖고 공감하도록 시간을 충분히 들여야 합니다. 어린이에 대한 교육과 함께 직장에서의 성평등, 육아휴직을 쓸 권리, 남성의 정신 건강 같은 여러 분야에서 성평등을 이야기해야 해요.”

 

8. 십대와 할 수 있는 연애와 섹스에 관한 질문들

(모바일에서는 옆으로 넘겨보기)

 

“교육을 시작한 후 놀란 점은 성별 고정관념을 깨야한다는 말에 대해 청소년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빨리 납득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2015년 우리가 시범 프로그램을 운영할 당시 취학 전 과정(만 5세)을 다니며 이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학교를 마칠 때까지 내내 교실에서 존중과 성평등에 대한 교육을 받는 첫 학년이 된다. 이 아이들이 바꿀 미래가 매우 기대된다.” (카라 글리슨)

 

″내가 만난 청소년들은, 세상이 지금까지 굴러온대로 앞으로도 굴러가지 않아도 된다는 걸 늘 알고 있는 것 같다. ” (무 바울취)

 

→ 번외편 조카에게 사주는 핑크색 머리띠가 왜 문제인 걸까?에서 ‘존중하는 관계 교육’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취재 도움: Cara Gleeson(Our Watch), Moo Baulch(DVNSW), Shanon Wright and Bobbie Trower(YWCA Australia)

*인터뷰 답변은 명료한 전달을 위해 편집되었습니다.

 

[Beyond Gender Project] 

1편. 인도

– ‘여성에게 위험한 나라 1위’ 인도의 ‘페미니즘 학교’를 찾아갔다

– 18세에 억지로 결혼해야 했던 소녀는 ‘위대한 교육자’가 되었다(인터뷰)

– ”남자가 성평등 교육을 받는 이유는 ‘더 나은 남자의 삶’을 위해서다”

2편. 호주

– ”맞을만해서 때렸다”는 말에 호주는 이렇게 대처했다

– “여성을 일상적으로 비하하는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난다”

– 가부장적인 남성들과 가부장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

”포르노가 성교육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 호주 학교들은 어린이들에게 ‘젠더 공교육’을 한다

– 조카에게 사주는 핑크색 머리띠가 왜 문제인 걸까?

3편. 스웨덴

– ’라떼파파’들은 아이 키우기를 피하지 않는다

– “나는 여자 안 때린다”고 말하는 남자들 뿐이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스웨덴 남성 페미니스트 단체 MÄN(맨)

– 성평등부 장관 오사 린드하겐 인터뷰

– 스웨덴 유치원들은 성평등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4편. 한국

– 지금 우리 초등학교 교실에서 성평등 교육을 하는 선생님들이 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