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손이 마비된 서예가는 어떻게 이름을 남겼을까

조선후기 예원에 독보적인 서화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있었다면, 근현대 서단에는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이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두 사람은 120년 이상의 세대 차이가 있으나 미술을 대하는 마음은 평행을 이룰 만큼 비슷한 면이 많다. 두 사람에게 가장 공통되는 일면은 옛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노력, 곧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다.

실제 서예가 유희강은 예술가로서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는 특별한 점이 많았다. 그는 옛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예술 세계를 찾으려 부단히 노력하였다.

당대 서예가들 중 일부는 옛 것을 답습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다른 일군의 서예가는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여 인격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비해 유희강은 예술가로서 창조적인 정신을 가졌고, 인생살이에서도 큰 흠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유희강의 존재는 한국 서예사의 보석과 같은 존재이다.

유희강의 극적인 삶의 역정
                

 
인천 출신 유희강은 가학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이를 바탕으로 명륜전문학원(지금의 성균관대학교)에 들어가 1937년에 졸업하였다. 1938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동방문화학원’에서 서양화를 배우는 한편 중국어를 공부하고 서예와 금석학을 연구하였다.

공부를 마친 후 그는 한커우(漢口)에서 광고회사를 운영하며, 때때로 시간이 날 때마다 난창(南昌), 상하이(上海) 등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때 같은 지역에서 서양화가 임군홍(林群鴻)도 광고회사를 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오가며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유희강은 중국에 있으며 상하이에 자주 머물렀는데, 이는 상해 임시정부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1945년 경 해방 즈음이 되어서는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주호지대장(駐戶支隊長)의 비서로 일하였다. 해방이 되고 임정 요원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앞장서 주도적으로 일했다. 이를 보면 유희강은 당시 미술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관여한 기개 있는 인물이었다.

1946년 귀국한 유희강은 인천시립박물관장과 인천시립도서관장 등을 역임하고, 여러 학교에서 글씨를 가르친다. 1962년부터는 서울 관훈동 ‘통문관(通文館)’ 건너편에 ‘검여서원(劍如書院)’을 열어 서예 연구와 후학지도에 힘썼다. 현재의 통문관 건물의 제자(題字)도 통문관 주인과 가까이 지내던 유희강이 1967년에 쓴 것이다.

통문관 이름을 쓴 이듬해 1968년, 유희강은 친구인 화가 배렴(裵濂)의 만장을 쓰고 귀가하던 중 뇌출혈이 일어나 오른쪽 반신 마비가 되어 서예를 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애주벽(愛酒癖)이 초래한 불상사였다. 서예가에게 글씨 쓰는 손 마비는 예술가로서는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유희강은 불굴의 의지로 남은 왼손으로 글씨 연습을 계속해 십 개월 만에 오른손 못지않은 글씨를 쓸 수 있게 된다.

서예는 필획의 움직임에 따라 글씨의 구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손이 바뀌면 새로이 본래의 글씨 수준을 이루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유희강은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좌수서(左手書)’ 세계를 열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그의 서예 세계는 ‘우수서(右手書)’ 시대와 ‘좌수서’ 시대로 나누기 시작한다. 이러한 재기는 세계 서예 역사에서도 찾기 힘든 불굴의 인간승리라 아니할 수 없다.

유희강의 미술 세계
             

 
유희강 예술의 본령은 서예에 있다. 그의 글씨는 전서·예서·해서·행서에 두루 능하였으나 특히 전서와 행서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그에 비해 초서는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그의 전서와 예서는 청나라 등석여(鄧石如, 1743-1805)를 주로 본받았으나 그에 머물지 않고 수많은 노력 끝에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를 만들었다.

또한 전서를 쓸 때 갑골문과 화상석의 문양을 사용한 것이 많은데, 이러한 것은 글씨라기보다는 그림이라 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창조적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이러한 문양을 서예 작품 바탕에 자주 배경 그림으로 그려 넣었다. 이러한 혼성적인 모습은 현대 미술에서 서로 다른 갈래를 혼성하는 것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해서와 행서는 처음에는 중국의 서예가 황정견(黃庭堅)과 유용(劉鏞)을 바탕으로 하여 유연하면서도 단정한 면이 많았다. 그러나 점차 이에 만족하지 않고 웅혼한 기운이 담긴 북위(北魏)시대의 글씨체를 더해 필획의 힘이 강한 서풍을 만들었다. 이런 노력이 더해져 그의 서풍은 당대 서예가들 중 특히 남성적인 면이 강하고, 대륙적 분위기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희강은 서예뿐만 아니라 그림과 전각에도 능하였다. 그의 그림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먹으로 유희하듯 빠른 필치로 그린 문인화인데, 구성 감각이 전문화가 못지않다. 특히 매화 그림에 매우 능했는데, 그의 강한 서예 필획이 매화 가지를 치는데 어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유학 초기에 서양화를 공부하며 습득한 소묘 실력도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전각(篆刻)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중국에서 공부하며 각고의 노력으로 연마한 것이다. 자신이 쓰던 인장은 대부분 스스로 전각한 것이다. 전각 솜씨에 있어서도 글씨체처럼 작은 것에 연연치 않고 시원스레 각한 특징이 있다.

유희강의 대표작 ‘완당정게’
                  

 
유희강이 남긴 수많은 작품 중에서 대표작으로 꼽는 것은 역시 ‘완당정게(阮堂靜偈)’이다. 이 작품은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준 정게(부처의 가르침 찬미)를 소재로 쓴 작품이다. 가운데에 불탑을 쌓듯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큰 글씨 여섯 자를 배치하고, 좌우에 잔글씨를 빼곡히 썼다.

가운데 글씨는 작은 글씨를 위로 하고 차례로 내려오며 커져 마지막 ‘불(佛)’자에서 마무리 되어 탑처럼 된다. 또한 좌우로 배치된 잔글씨는 글자 크기도, 행간의 제약도 없이 자유롭다. 마치 글씨들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얽매이는 것 하나 없이 자연스럽다. 이 작품은 비록 작은 글씨이지만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고, 불교 사상과 같은 동양 사상의 축적 같기도 하다.

유희강은 ‘검여(劍如)’라는 강한 호를 쓰기도 했지만, 말년에는 주로 ‘소동파와 김정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소완재주인(蘇阮齋主人)’을 주로 썼다. 그가 왜 소동파와 김정희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완당정게’를 보면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또한 “며칠만 글씨를 생각하지 않으면 벌써 붓의 획이 무디어지는 것 같다”고 말하던 유희강의 서예에 대한 예술혼이 몰입해 완성되고 있음을 느낀다.

한 생애를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유희강의 작품은 세상에 흔하게 널려 있지 않다. 작가가 평소 작품 매매에 관심이 적어 파는데 신경을 쓰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만한 곳이 없어 애호가들에게 늘 아쉬움을 주었다.

그런데 2019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유희강의 후손들이 부친의 모교인 성균관대학에 작품 일천여 점과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 붓, 방명록, 사진 등 대부분의 자료를 어떤 조건도 없이 모두 기증한 것이다.

이 중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단연 ‘관서악부(關西樂府)’이다. ‘관서악부’는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가 어린 시절부터 친구인 채제공(蔡濟恭)이 1774년 평안감사로 부임하자 평양 역사와 유적을 소재로 지은 108수 연작시이다. 신광수는 ‘관서악부’를 또 다른 친구이자 글씨에 능한 강세황(姜世晃)에게 써 달라고 부탁했으나,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 강세황은 글씨를 완성하여 신광수 아들에게 전한다.

유희강은 말년에 유독 ‘관서악부’를 쓰는 일에 집착한다. 그는 ‘관서악부’를 세 차례 썼다고 하는데, 마지막 작품은 생을 마감하기 전 6개월간 매진해 작업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친구인 한학자 임창순(任昌淳)에게 교정을 부탁한 사이에 숨을 거둬 발문을 쓰지 못한다. 결국 임창순은 유희강 사후에 발문을 넣어 완성시킨다.

‘관서악부’는 34미터나 되는 대작일 뿐만 아니라 유희강 서예 예술의 기념비가 될 만한 작품이다. 이 대작은 유희강이 마치 서예가로서의 마지막 혼을 집어넣으려는 듯 온 정성을 기울여 어느 한 곳 흐트러짐 없는 절필이다.

어쩌면 그는 강세황이 신광수의 청을 들어 붓을 들었던 마음으로 글씨를 썼는지 모른다. 신광수와 강세황, 유희강과 임창순 이들은 ‘관서악부’라는 작품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하늘이 내린 인연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