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실이 대를 이어 방문한 한국의 절

1516년 후에 조선 성리학의 태두가 되는 열 여섯 살 소년 이황이 봉정사를 찾았다. 그로부터 50년 후인 1561년 일흔을 바라보는 퇴계는 또 한 번 봉정사를 찾았다. 1999년 영국 왕실의 상징인 엘리자베스 여왕 2세가 봉정사를 방문했다. 영국 왕실 최초의 한국 사찰 방문이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지난 5월 그의 둘째 아들 앤드류 왕자가 대를 이어 봉정사를 찾았다. 2018년도에는 휴가를 맞은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봉정사를 찾았다. 무엇이 이들의 발걸음을 봉정사로 이끄는 것일까?

지난 5월 경북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에 자리한 봉정사를 찾았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천등산 천등굴에서 득도를 한 능인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접은 봉 한마리를 날려 살포시 내려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 천등산의 원래 이름은 대망산이었다. 능인을 시험하려 옥황상제가 보낸 아리따운 여인을 능인이 내치차 능인의 굳은 의지에 감명한 여인은 등불을 선물하였다. 등불의 도움을 받아 수련을 계속한 능인이 마침내 득도를 하였으니, 이후로 대망산을 천등산이라 고쳐부르고 능인이 수행한 굴을 천등굴이라 불렀다는 창건 설화가 전한다.

봉정사 창건과 역사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때문에 몇 차례 중수 사실을 제외하면 봉정사 내력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창건 설화도 상당 부분 허황되다. 그럼에도 봉정사는 범접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지는 사찰이다. 작고 소탈하지만 봉정사의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돌은 돌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흙은 흙대로, 저마다 생긴 그대로 어우러져 있다. 천칠백년 이어져 오는 순리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러한 지극함이 있기에 영국의 왕실도 대통령도 발걸음을 하는 것이 아닐까.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과 후불탱화 보유

봉정사에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귀한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그 중의 몇 점에는 우리나라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 311호)은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축물이고, 대웅전 후불벽화 영산회상도(보물 제 1614호)는 가장 오래된 후불 벽화다.

극락전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72년 극락전 중수 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1363년에 극락전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13년 앞서 중수가 이루어졌음이 밝혀져 부석사보다 더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중수연대 외에도 전문가들은 고구려 양식으로 통하는 극락전의 건축양식은 부석사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건축양식이라는 점을 더 확실한 근거로 내세운다.

1997년 발견된 대웅전 후불벽화 영산회상도는 2000년 대웅전 지붕 수리공사 때 1428년(조선 세종 10년)에 그렸다는 글귀가 적힌 상량문이 발견돼 이제까지 가장 오래된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화보다 무려 40~50년 앞선다는 것이 밝혀졌다.

조선시대 다포계 목조건축물의 최고봉인 대웅전(국보 제 311호)과 화엄강당(보물 제 448호), 고금당(보물 제 449호) 등은 주저없이 봉정사를 ‘목조건축의 보고’라 부르게 한다. 목조관세음보살좌상(보물 제 1620호), 영산회괘불(보물 제 1642호), 고려시대 삼층석탑 등이 사찰의 품격을 드높이고 있다.

2000년도 발견된 상량문으로 조선 초 봉정사는 지금과 달리 ‘500여 결(1만여 평)의 논밭을 보유하고 안거스님 100여 명에 75칸의 팔만대장경까지 보유하고 있던 ‘대찰’이었음이 밝혀졌는데, 그 사세를 유지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고향집 마당같은 절

일주문을 지나 봉정사까지는 아름다운 솔숲이 이어진다. 오래된 소나무와 굴참나무의 진한 향이 숲 속에 가득하다. 가파란 돌계단을 오르면 누마루를 굳게 받치고 있는 굵은 원통 기둥과 누마루가 시선을 사로 잡는다. ‘천등산 봉정사’ 현판이 당당하다. 비바람에 휘어진 기둥이며, 벌어진 틈새며, 분칠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 촌부의 모습이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을 모아 쌓은 축대와 담벼락은 시골집 담벼락과 다를 바 없었다. 오래도록 삭고 견디어 온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문지방을 넘어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앞마당과 대웅전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탑과 석등이 없는 마당은 사찰보다는 여염집 마당같은 느낌이다. 대웅전의 날렵한 팔작지붕은 천등굴에서 날아온 종이봉의 날개인가 싶다. 수평적 구조가 안정적이다. 대웅전 전면을 두르고 있는 툇마루가 무척 특이하다. 대웅전에는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후불벽화는 현재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대웅전과 마주한 만세루는 무성한 나뭇잎에 파묻혀 있다. 초록 물결 위에 떠 있는 섬같다. 목어가 북소리에 맞춰 헤엄치며 노니는 듯하다.

봉정사의 가람배치는 안쪽 깊숙히 극락전과 대웅전을 모시고, 두 전각 사이로 고금당, 화엄강당, 요사체를 배치한 모습이다. 화엄강당에 의해 극락전 영역과 대웅전 영역이 독립적인 공간으로 구분된다.

극락전 앞마당의 고려시대 3층 석탑과 선방인 고금당(보물 제 446호)의 어울림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맞배지붕의 극락전은 극도의 간결함을 자랑하며 서 있다. 중앙의 판문과 양 옆의 창살이 있을 뿐이다. 영국 여왕도 극락전에 반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극락전 앞마당에는 1999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 기념사진과 소원탑이 보인다.

극락전 옆에는 못생긴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본래 안정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해 이곳으로 옮겨졌다.

유학의 태두 퇴계 이황과 봉정사의 만남

봉정사는 퇴계 이황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절이다. 숭유억불을 고집한 조선 시대에 유학의 태두 퇴계와 봉정사의 인연이라니 얼핏 잘 연결이 안 된다.

봉정사 들머리 초입에서 살짝 옆으로 비껴 나간 곳에 ‘명옥대’라는 아담한 정자가 있다. 열 사람도 거뜬히 앉을 수 있는 너른 바위가 급격하게 기울며 절벽을 이루고, 그 절벽 아래로 계곡을 타고 내려온 물이 힘차게 곤두박질친다. 진입로에서는 숲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건만 전면에는 너른 논과 밭이 펼쳐진다. 깊은 산속에 앉아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형세다. 기묘한 풍경이다.

이곳은 퇴계 이황이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강학을 하던 장소로 원래 이름은 낙수대였으나, 중국 서진의 시인 육기가 쓴 ‘나는 샘에서 명옥을 씻어 내리네’라는 시구에서 글귀를 따와 명옥대라 고쳐 불렀다.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우는 소리같다는 뜻이다. 1665년 사림에서 원래 있던 두칸 짜리 방을 허물고 지금의 누마루 형식으로 개조하였다.

퇴계 이황은 16세 때인 1516년 봄부터 가을까지 봉정사에 머물며 독서와 학문을 하였다. 그로부터 50년 후인 1566년 퇴계는 봉정사를 다시 찾았다. 그 해 1월 조정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가던 중 병환으로 사직소를 올리고 광흥사, 봉정사에 머물며 강학을 하였다. 봉정사에 머무는 동안 퇴계는 제자 금계 황준량의 문집 <금계집>을 교정하고 ‘봉정사 서루’, ‘명옥대’와 같은 시를 남겼다.

이곳에서 노닌 지 오십 년
젊었을 적 봄날에는 온갖 꽃 앞에서 취했었지
함께 한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푸른 바위, 맑은 폭포는 예전 그대로인데
맑은 물, 푸른 바위 경치는 더욱 기이한데
감상하러 오는 사람 없어 계곡과 숲은 슬퍼하네
훗날 호사가가 묻는다면
퇴계 늙은이 앉아 시 읊던 때라 대답해주오

– 퇴계 이황 <명옥루>

찾는 이 없는 명옥대에는 풀벌레 소리와 물 떨어지는 소리만 요란하다. 퇴계는 일찍이 ‘감상하러 오는 사람없어 계곡과 숲은 슬퍼하네’라고 노래했다. 젊은 날의 정든 벗들은 떠나고 찾는 이는 없고, 홀로 남은 노학자의 회한과 쓸쓸함이 고스란히 명옥대에 쌓여 있다.

(템플스테이 후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