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일상적으로 비하하는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난다"

'아름답고 집안일을 잘하고 남편을 보필하는 아내'는 남성에게 의지하며 남성의 통제를 받는 전형적인 전통 여성상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귀속하는 가족관계는 때로 사회 문화 전체로 확대된다.

→ 호주 성평등 기획취재 1편: ‘맞을만해서 때린 거다’는 말에 호주는 이렇게 대처했다에서 이어집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3년, 남성에 의한 폭력의 원인을 더 많은 각도에서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늘고 있는 지금 가정폭력에 관한 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호주를 찾았다.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아래 전한다.

 

“여성을 비하하고 성역할이 굳어진 곳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난다”

부부, 애인 사이의 폭력에 대해 ‘있을 법 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호주에도 있다. 2013년 빅토리아주 보건부가 16세에서 24세 사이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거의 4분의 1이 ‘파트너가 너무 화가 나서 자제력을 잃은 경우 폭력이 용서될 수 있다’고 답한 것이다.

성교육과 폭력예방교육 전문가 마리 크랩은 여성에 대한 비하가 만연하고, 성역할이 경직된 문화를 가진 사회일 수록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많다고 말한다.

“여성의 독립성이 제한되고 남성에게 통제권이 더 많아 불균형한 성별 관계가 형성된 사회.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과 역할이 굳어진 사회.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를 일상적으로 하는 사회. 폭력을 ‘그럴 수 있다’고 용인하는 사회에서 가정폭력이 일어납니다.

크랩은 포르노에서도 십대들이 왜곡된 섹스와 성별 간 권력 관계를 배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포르노에는 목을 졸리거나 모욕적인 행위를 당하면서 미소를 짓거나 즐기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여성 캐릭터가 자주 등장한다.

“포르노에서 거친 행위를 당하는 쪽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라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게다가 포르노 속 폭력은 유독 자연스러운 걸로 느껴지도록 그려지죠. 주로 여성인 상대 배우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당하는 걸 즐기는 듯한 연기를 합니다. 당하는 쪽이 남성인 경우도 가끔 있지만, 폭력을 행하는 쪽은 그때도 항상 남성이죠. 그러니 실제 연애나 섹스 경험이 부족한 시청자일수록 ‘여자들은 남자들이 목을 조르거나, 뺨을 때리는 걸 좋아한다’고 오해하게 되죠. 여성이나 소위 ‘여성 역할을 하는 사람’을 모욕적으로 대우하는 게 정상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 겁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고민해 온 정책입안자들과 시민단체들은 이런 문화를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고 봤다. 가해자와 피해자에 집중하는 것에서 나아가, ‘예방’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기로 한 것이다.

호주 YWCA의 선임 활동가 보비 트로어는 “가정폭력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건강한 인간 관계가 어떤 건지 학교에서 배우고, 그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 남성과 여성이 각각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사회 전반적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십대 남자들은 남자가 연애 관계의 주도자라든가, 나이가 들면 자기가 집안의 책임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엄마 아빠의 역할이 당연하게 정해져 있는 지금 이대로도 정말 괜찮은 걸까?

트로어는 ‘건강한 관계’, ‘건강한 마음’의 문제도 ‘건강한 신체’의 문제처럼 바라보고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 피해자 관련 일을 하다보면, 예방에 더 신경을 썼더라면 우리가 도울 피해자가 훨씬 적을텐데,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비만이나 다른 질병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면 예방 캠페인을 열심히 하잖아요? 폭력 예방도 똑같이 봐야 해요. 아이들에게 건강한 관계에 대해 더 일찍 가르쳐야 합니다.”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은 단지 ‘때렸다’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욕설이나 주먹이 나가는 행동 뒤에는 '힘 세고 제왕적인 가장'이라는 성역할 가면이 있다.

허프포스트가 만난 전문가들과 관계자들은 공통적으로 가정폭력의 큰 원인 네 가지 중 하나로 이처럼 성 역할 고정관념이 강력한 사회를 꼽았다. 다른 세 가지는 어릴 때 학대 당한 경험, 알코올과 약물 남용 문제,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자원에 대한 접근성 부족(빈곤의 악순환)이다.

폭력 가해 남성이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반드시 이수하도록 되어있는 재발 방지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단체로 ‘노 투 바이얼런스’(이하 NTV)가 있다. NTV에서 프로그램 개발 및 교육 진행을 담당하는 카멜 파디는 허프포스트에 “가해자의 정신건강과 중독 여부는 폭력을 저지르는 데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지만, (어디까지나 영향일뿐) 행동의 책임은 결국 가해자에게 있다”고 말한다.

“가정폭력은 단지 ‘때렸다’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에요. 가정에서의 학대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통제하려는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육체적인 폭력뿐 아니라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학대가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봐도 그렇죠. 사회에는 분명 성별간 권력 구조가 있습니다. 가정폭력에는 남성이 경제권을 포함한 집안의 권력을 틀어쥔다는 전통적인 성역할 문제가 엮여 있어요.”

자기 자녀에게 폭력을 쓴 남성 중에는 “아이와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는데 잘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정신건강과 중독 문제가 생긴 배경을 들여다보더라도 이런 전통적인 성역할을 학습한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지적의 목소리 역시 높다. NTV의 정책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맷 애디슨은 교육을 받으러 온 가정폭력 가해 남성들이 모두 무시무시한 폭력배 같은 모습은 아니라며, “아이와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는데 잘 안 된다”고 토로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고 말한다.

“본인이 원하는 건 애정 넘치는 가족 관계지만, 그것과는 반대되는 가부장적인 남성상을 따르다가 뜻대로 안 될 때 해결 수단으로 폭력을 쓴 경우들입니다. 이런 남성들은 우울할 때 병원을 가거나 주위에 상담을 하는 대신 술이나 마약에 빠지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이 마음을 열고 자기 감정을 말로 표현할 줄 알게 되면, 문제 해결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확률이 높을 거라고 봅니다.”

애디슨은 그렇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변화와 함께 더더욱 시민 개개인의 변화도 함께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덜 가부장적’이고, 여성이 더 안전하고, 어느 영역에서든 성평등이 이뤄진 사회를 만드는 게 우리 목표예요. 이건 가해자 개인개인이 반성한다고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에요. 하지만 동시에, 이들 개인개인이 이런 목표에 공감을 느껴야 변화할 수 있다고 봐요.”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분홍과 파랑으로 성별 정체성을 부여 받는다”

아직도 남자아이들에게는 활동적인 놀이 캐릭터와 공격적인 장난감이, 여자아이들에게는 활동이 불편한 (주로 핑크색) 드레스와 왕관이 주어질 때가 많다.

시드니에 살며 고등학교 졸업을 1년 앞둔 오로라(16)는 교실에 성평등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 중 하나다. 기자와 만난 오로라는 학생들만이 아니라 교사들에 대한 페미니즘 교육도 필요하다고 했다. 벌써 몇 년 전 일이지만, 같은 반 남자아이로부터 끈질긴 성희롱을 당한 걸 두고 한 여성 교사가 “널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라고 말했을 때 느낀 좌절감을 잊을 수 없다.

“그것 말고도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바로 오늘도 들은 말이 있어요. 교실에서 선생님들이 ‘힘 센 남자애들 나와봐’라고 말하는 거요. ‘힘 센 여자애들’, ‘힘 센 학생들’이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아요.”

″진로교육 할 때는 더 심해요. (자료에) 여자들은 돌보거나 가르치는 일, 가사 일 같은 분야에 그려져 있고, 남자들은 건설이나 기술 분야에 그려져 있고요. 여자는 천성적으로 남을 잘 돌보니까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말들을 저에게 하는데, 그건 고정관념이에요. 어쩌면 마침 저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게 아니거든요.

청소년 폭력 예방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한 ‘아워 워치’(Our Watch)의 디렉터 카라 글리슨은 ‘ 성평등 교육은 가능한 한 더 어린 나이에 해야 하며, 이는 교사들을 교육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분홍과 파랑으로 성별 정체성을 부여 받아요. 분홍색 세상에 살든 파란색 세상에 살든 그게 자기 선택이라면 관계 없겠죠. 하지만 어른들은 성별에 따라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하고 또 가르칩니다. 이런 아이들의 행동에는 많은 한계와 제약이 생길 수 밖에 없어요.”

'존중하는 관계 교육' 자료 중에서. “강간, 살인, 신체적 학대, 감정적 학대”가 수면 위에 드러난 빙산 윗 부분이라면, “해로운 성별 고정관념, 여성에 대한 비하, 통제, 협박”이 수면 아래에 진짜 원인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내용을 표현한 그림.

‘타인을 존중해야 한다’, ‘성별 고정관념을 깨자’의 두 가지를 핵심 가치로 삼은 이 성평등 교육 프로그램의 이름은 ‘존중하는 관계 교육’(Respectful Relationships Education)이다.

초등학교 준비 과정인 만 5세부터 고등학교 졸업반인 만 17세까지 전 학년이 대상이다. 가장 먼저 시작한 빅토리아주에서는 이제 교육 시행 5년차를 맞았다.

글리슨이 강조한대로, 전문 강사가 나서는 대신 현직 교사들이 직접 이 교육을 하기 위한 교육을 따로 받는다. 전문 강사가 훌륭한 인권 강의를 할 수는 있겠지만, 이들이 떠난 후 인권이나 성평등 감수성이 부족한 일반 교사들이 다시 아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어린이들에게 폭력이나 성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이 성별의 한계에서 벗어나서, 긍정적이고, 동등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인간 관계를 맺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거죠.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따로 있지 않다’, ‘(편견에 갇히기보다)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사람이 되자’고 가르칠 뿐입니다.

호주에서 만난 섀넌 라이트(YWCA), 카라 글리슨(Our Watch), 무 바울쉬(DVNSW), 오로라 맷챗(YWCA 청년 여성 자문 멤버) [왼쪽부터 시계방향]

교육이 도입된 후 호주의 어른들이 깨달은 것은, 청소년들은 불평등에 대해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교육의 내용을 기대한 것보다 훨씬 빨리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처음 이 프로그램을 시작한 2015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내 교실에서 존중과 성평등에 대한 교육을 받은 첫 세대가 되겠죠. 이 아이들이 바꿀 미래가 매우 기대됩니다.” (카라 글리슨)

“성평등은 모든 사람이 존중 받고 폭력을 겪지 않는 튼튼한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거예요. 성평등한 세상이 되면, 남성들의 사회적 압박도 많이 덜어질 거예요. 남들이 원하는 남성상이나 여성상이 아니라, 각자 원하는 인간상이 되어 살 수 있으니까요.” (무 바울쉬)

세계 곳곳에서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을 두고 ‘이제 여성폭력 대신, 남성에 의한 폭력이라고 부르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피해자들에게 범죄의 원인이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부적절할 뿐 아니라, 남성 성인과 아동 피해자도 있는 등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들에게서 공통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되는 일들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까? 정말 성평등 교육이 아이들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외에도 강력 사건까지 예방할 수 있는 걸까? 내일(17일)부터 호주에서 만난 이들의 자세한 인터뷰를 이어 더 소개한다.

 

[Beyond Gender Project] 

1편. 인도

‘여성에게 위험한 나라 1위’ 인도의 ‘페미니즘 학교’를 찾아갔다

18세에 억지로 결혼해야 했던 소녀는 ‘위대한 교육자’가 되었다(인터뷰)

”남자가 성평등 교육을 받는 이유는 ‘더 나은 남자의 삶’을 위해서다”

2편. 호주

– ”맞을만해서 때렸다”는 말에 호주는 이렇게 대처했다

-“여성을 일상적으로 비하하는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난다”

– 가부장적인 남성들과 가부장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

– ”포르노가 성교육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 ”울어도 된다”고 알려주자 남자아이들의 행동이 달라졌다

3편. 스웨덴

– ’라떼파파’들은 아이 키우기를 피하지 않는다

– “나는 여자 안 때린다”고 말하는 남자들 뿐이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스웨덴 남성 페미니스트 단체 MÄN(맨)

– 성평등부 장관 오사 린드하겐 인터뷰

– 스웨덴 유치원들은 성평등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4편. 한국

– 지금 우리 초등학교 교실에서 성평등 교육을 하는 선생님들이 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취재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