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유진 초이와 애신이 사진놀이에 여념 없는 곳

2박 3일 동안 봉정사에 있으려니 살짝 좀이 쑤신다. 안동에는 우리나라에서 10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하회마을, 퇴계이황을 모시는 도산서원, 서애 류성룡을 모신 병산서원, TV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의 촬영지 만휴정과 고산정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산실인 임청각 등 명소가 수두룩하지 않은가. 봉정사 템플스테이에서 잠시 벗어나 일명 ‘땡땡이’를 감행하기로 한다. 목적지는 요즘 ‘핫’하게 떠오른 ‘임청각과 만휴정’으로 정했다. 

만휴정&묵계고택 
 

 
만휴정은 1986년 경북문화재자료 제 173호로 등록되고,  2011년에 명승 82호로 지정된 정자와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원림이다. 그러나 유진 초이와 애신이 없었다면 만휴정은 지금도 산 속의 호젓한 정자로, 아는 사람만 아는 곳으로 남았을 것이다.

만휴정이 있는 묵계리는 계명산, 임봉산과 황학산에 둘러싸여 있고, 앞쪽으로는 길안천이 흐르는 작은 촌동네이다. 이 촌구석에 흙먼지를 날리며 수많은 자동차가 이어지는 것은 순전히 만휴정 덕분. 만휴정은 마을에서 다리를 건너 계곡쪽으로 20m정도 오른 지점에 있다.

무성한 숲을 배경으로 나무들 틈으로 폭포의 하얀 물줄기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내 외나무 다리와 건너편 멋스런 팔작지붕이 얼핏 보인다. 만휴정이다. TV에서 본 딱 그 풍경이다.
  

 
만휴정으로 건너는 다리 위에서는 수많은 유진과 애신이 사진놀이에 여념이 없다. 한참을 기다려 다리를 건너 정자에 들어선다. 부모를 잃고 추노꾼에 쫒기던 어린 유진이 힘겹게 찾아 들었던 곳이다. 

굶주림에 허겁지겁 감자(주먹밥)을 훔쳐 먹다 들킨 어린 유진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찬이 입에 맞어? 그렇게 먹으면 체해. 우물은 저쪽이다’라는 대사와는 다르게 만휴정에는 우물도, 가마터도 혹은 드라마 촬영지였음을 상기시키는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시끌벅적한 계곡과 다리 주변과는 달리 정자 내부는 조용하다. 정자라기 보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온전한 집처럼 보인다. 계곡 암반 위로 축대를 쌓고 담장을 두루고 출입문까지 두었다. 정면에는 누마루가 있고 양쪽에는 온돌방이 있다. 작은 마당이 있고, 뒤편은 산과 맞닿아 있다.

정자 안에는 김양근의 만휴정 중수기와 김양근, 김굉, 이도원, 김도행 등의 시들이 걸려 있어 풍류를 즐기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곳에 앉아 공부를 하면 고시든, 자격증 시험이든 단박에 붙을 것 같다. 반대로 아름다운 풍광에 공부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전면의 계곡과 뒤편의 산, 아름다운 소와 폭포, 계류가 한데 어우러져 그림같은 풍광을 연출한다.

보백당 김계향(1431-1517)은 50세가 넘어 과거에 급제하여 대사성과 홍문관부제학, 대사간(연산군 4년) 등의 관직을 역임한 조선전기의 문신이다. 20여 년간 관직생활을 하면서 무려 8명의 임금을 모셨다. 

갑자사화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옥고를 겪고 고향인 풍산읍 소산에 작은 정자를 짓고 보백당이라 이름짓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듬해 길안면 묵계리로 와서 만휴정을 짓고 ‘만휴’를 즐겼다. 그의 나이 70이 넘어서 겨우 찾은 ‘만휴’다. 보백당 선생이 죽은 후 만휴정은 25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으나, 그의 후손들에 의해 1790년에 중수되었다. 

만휴정 앞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집에는 보물이라고는 없다. 오직 청백만이 보물이다”란 뜻이다. 청백리 보백당의 성품이 담긴 그의 유훈이다. 청렴한 선비의 향취가 물씬 풍긴다. 만휴정에 앉아 요즘은 통 볼 수 없는 선비들의 ‘청렴’의 미덕에 대해 생각해본다. 
 

 
만휴정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오르면 또 다른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만휴정만은 못하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관람객을 피해 잠시 호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마침 산에서 고사리나물을 한짐씩 지고 내려오던 아주머니들이 베낭을 풀어놓고 잠시 쉬고 있다. 그들 틈에 끼어 나도 잠시 ‘만휴’를 즐겨본다. 

길안천 건너편에는 묵계종택과 제자들이 세운 묵계서원이 있다. 종택 앞 마당에서 노거수가 먼저 반긴다. 한복체험과 한옥스테이가 가능하다. 차를 마시며 잠시 쉬어갈 수도 있다. 

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 철도와의 거리는 단 7m
  

 
만휴정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30여 분 정도 달리면 임청각에 닿는다. 임청각 앞으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35번 국도와 철로가 지난다. 철도 뒤편에 길게 쳐진 흉물스러운 가로막이 보인다. 가로막 뒤편 작은 골목길에 임청각과 우리나라 국보 제 16호인 법흥사 칠층전탑이 옹색하게 서 있다. 
  

 
임청각은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의 종택으로 보물 제 182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조선시대 반가의 고택이다. 1519년 지어진 고택은 건립 당시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을 갖춘 99칸 전형적인 상류층 가옥이다.
 
일제 강점기 종택은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훼손되었다. 고성 이씨 가문에서 독립운동가들이 계속 나오자 가문의 정기를 끊겠다며 행랑채와 부속건물 50칸을 철거하고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부설한 것이다(1942년). 지금도 흉물스러운 가로막을 사이에 두고 중앙선 기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간다. 철길과 종택의 거리는 불과 7m. 기차길옆 오막살이도 아니고 이건 너무했다. 

안동 고성 이씨 가문에서는 일제가 정기를 끊기 위해 집까지 훼손해야 했을 정도로 독립운동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일가 친척 모두를 합하면 50여 명에 달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 석주 이상룡 선생이 망명길에 오르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석주 선생은 1911년 전답 등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는데 ‘망한 나라에서 조상을 모시는 것이 부끄럽다’며 조상의 신위와 위패도 모두 땅 속에 묻었다.
  

 
석주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부민당 등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는 등 평생 조국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1932년 중국 길림성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1990년 한국으로 모셔져 국립현충원 임정수반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1962년 건국장 독립장에 서훈되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3대에 걸쳐 모두 10명의 독립운동가(서훈)가 배출되었다. 2018년 제 73주년 광복절에 그의 손부 허은 선생이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종택 임청각은 안동 독립운동가의 산실이자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임청각 대문을 들어서면 군자정과 아담한 연못이 반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시인들이 다녀간 곳이다. 군자정 누마루에 올라 안에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하고 조국독립의 결기를 다졌을까.

임청각 위쪽에 있는 사당에는 조상의 신주 대신 독립운동에 헌신한 후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뒷동산에는 과거 임청각 선비들이 걸었던 ‘임청각 소담길’이 조성되어 있다. 총 15분 정도 소요되는 길이다. 소담길에 서니 비로소 낙동강과 안동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침 중앙선 기차가 지나간다.
 

 

‘어찌 대장부가 제 한 몸을 아끼랴
잘 있거라 고향 동산 슬퍼하지 말아라
태평한 그날이 오면 돌아와 머물리라.’

 

 
이상룡 선생이 조국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선생의 유해는 조국에 돌아와 묻혔지만 그가 그리워했을 고향동산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채로 남아 있다.

임청각 복원사업이 진행중이라니 다행스럽다. 2010년부터 시작된 도담-영천 145 km구간의 복선화가 완료되면 담장과 종택의 거리는 6km로 멀어진다. 2020년 완공 예정이다. 이에 맞춰 종택의 원형복원 및 기념관과 기념공원 건립 사업도 진행 중이다.

임청각에서는 한옥민박을 운영한다. 매월 3째주 음식체험, 등불체험, 전통놀이 체험, 한복체험, 나들길 걷기 등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임청각 홈페이지 http://www.imcheongg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