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해보였던 엄마, 나도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45kg. 엄마는 평생 그 몸무게였다. 그 작고 마른 몸은 언제나 위태로워 보였다.

평일 저녁, 우리 집 텔레비전은 9번에 고정되어 있었다. KBS에서 해주는 9시 뉴스를 보기 전까지 8시 반에 해주는 일일연속극을 봤다. 식상한 레퍼토리와 똑같은 등장인물로 재탕해 먹는 그 드라마들을 엄마는 습관적으로 시청했다. 그리고 8시 55분이 되면 “오늘 누가 내(나) 대신 설거지 좀 안 해줄라나”하고 옆으로 슬며시 누웠다. 나더러 설거지 좀 해달라는 뜻이다.

그때마다 나는 군말 없이 그릇을 걷어 부엌으로 향했다. 중학생인 내가 봐도 엄마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엄마가 “아고아고, 여기가 따숩네”하고 보일러가 잘 도는 뜨끈한 자리에 방석을 베고 누워, 나른하게 TV 보는 그 시간을 나는 지켜주고 싶었다.

엄마는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두 시간 동안 공부하고 6시가 되면 압력솥에 밥을 올렸다. 할아버지 밥상부터 오빠 도시락까지 하루 열 끼를 차릴 때였다. 엄마는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출판물류회사에 다녔다. 종일 쪼그리고 앉아 반품 들어온 책을 풀고 분류해서 날랐다. 허리와 무릎에 부담이 많이 가는 일이라, 새벽마다 근육통으로 앓기 일쑤였다.

나는 가끔 그 소리에 일어나 파스를 붙여주고 안마를 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일찍 죽으면 어쩌나 두려워하며 잠들었다. 이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날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우리 집 텃밭에는 호박, 배추, 고추 따위가 무럭무럭 자랐다. 푸성귀를 키우는 게 엄마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다. 나는 종종 밭에 물을 주러 갔다가 시꺼먼 시골 모기에 물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엄마는 왜 저렇게 열심히 살까? 그래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데, 억울하지도 않나? 엄마를 돕는 건 왜 나뿐인가? 오빠는? 아빠는? 안쓰럽고 미안한 동시에 짜증이 솟구치는, 나의 이 복잡한 마음을 엄마는 알까.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못한 채 어른이 되어갔다.

엄마의 끝없는 노동 바라보던 딸의 죄책감

내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이 이혼했다. 오랫동안 바라던 바였지만 이후의 날들은 순탄치 않았다. 엄마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식당 설거지부터 매점 종업원, 간병인까지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내 집이 있었던, 정규직 노동자로서 가졌던 굳건한 자부심은 떠나온 곳에 묻어두었다. 타지에서 가진 것 없이 일하면서 억울해도 참고, 더 억울한 일이 생기면 짐을 쌌다.

나는 자신을 방어하는 동시에 걸핏하면 엄마를 모욕하려 드는 세상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득권을 가진 자의 표독한 얼굴이기도 하고,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사람을 후려치는 권력자의 고함이기도 했다. 그 모든 밑바탕에는 폭력을 행사하는 아빠의 얼굴이 깔려 있었다. 나는 강해지고 싶었다. 이 무례한 사람들과 긴 노동, 돈 걱정으로부터 엄마를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자식들의 번데기 기간이 길어지는 동안 엄마는 점차 쇠약해졌다. 오빠와 나는 취업 준비를 하느라 몇 년간 유예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에게 희망은 딱 하나였다. 식구들이 다 같이 돈 버는 시기가 오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되리라는 희망.

2013년 가을에는 내가, 그해 겨울에는 오빠가 취직했다. 그리고 2014년 봄, 엄마가 쓰러졌다. 위태로움에는 끝이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욕심을 덜 부렸더라면, 어디라도 일찍 취직했으면 엄마가 이렇게까지 병을 얻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 자책. 사람이 누울 자리 보고 뻗는다고 했다. 자식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자 그제야 온몸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엄마는 임금노동에서 강제로 은퇴하게 되었다.

몇 년 뒤 오빠와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결혼했다. 여전히 비가 오면 물이 넘칠까 걱정되는 반지하에 엄마를 남겨두고서 우리는 각자 볕이 잘 드는 집으로 이사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한 팀이 아니었다.

긴 휴가를 맞은 엄마는 홀로 자기 생을 응시하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만날 때마다 과거를 곱씹었다. 외할머니는 어쨌고, 자기가 결혼할 때는 어땠는데 하는 옛날이야기가 라디오마냥 흘러나왔다. 마지막은 꼭 “내가 요 모양 요 꼴로 살지 아무도 몰랐지”하는 푸념으로 끝났다.

엄마가 자기 자신에게 붙인 ‘이혼’과 ‘가난’이라는 수식어 앞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모든 게 내 탓 같아서, 이대로는 내가 마음 놓고 행복해지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덜 미안하기 위해서 엄마가 자기 삶을 긍정하게 되기를 바랐다.

소문자 ‘삶’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구술생애사를 만났다. 가까운 곳에서 “소문자 ‘삶’이 말하기 시작했다”는 이름의 구술사 강좌가 열리고 있었다. <할배의 탄생> 등의 저작으로 유명한 최현숙 작가의 강의였다. 대문자 역사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보편과 정상을 의심하며, 가난을 옹호한다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 맥락에서는 엄마의 이혼과 가난도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인터뷰를 통해 엄마의 구술을 받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수업을 듣는 동안 엄마한테 열심히 밑밥을 깔았다. 최현숙 작가의 책들을 갖다 주며 “엄마, 이거 봐라. 여기 주인공도 엄마처럼 요양보호사로 일했대” 하고 미끼를 던졌다. 엄마는 책에 실린 친구뻘 이들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그녀들의 “개떡 같은” 남편들을 욕하기도 하고, 아픈 몸을 염려하기도 했다. 늘 대문자의 시선에서 자기 삶을 평가절하해 왔던 엄마도, 그들과 같은 소문자의 입장에서 나 이렇게 살았노라 당당하게 입을 열게 되기를 바랐다.

마침내 녹음기 버튼을 누르는 날이 왔다. 처음에는 자기 얘기 들려주기 싫다고 손사래 치더니만, 막상 입을 떼고 나니 얘기가 술술술 이어졌다. 첫 인터뷰부터 엄마의 핵심 주제는 ‘노동’이었다. 엄마는 일 얘기를 할 때 유독 눈빛이며 기억이 또렷했다.

40년 전 마산자유무역지구의 방직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할 적에 썼던 일본말이며, 30년 전 만화 가게를 운영하던 시절의 <흙바람> 같은 만화책 제목을 줄줄 읊어대고, 15년 전 출판물류센터에서 일할 때 자기 별명이 사전이었다며 본인이 맡았던 출판사명을 아직도 꿰고 있었다.

이혼 후 계약직을 전전하며 박봉을 받을 때조차, 엄마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았다. 엄마에게는 40년 넘는 세월 동안 제 손으로 밥벌이해온 자로서, 근면한 노동자로서 지켜온 자부심이 있었다. 그간 나는 엄마를 연약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실제의 그녀는 훨씬 유연하고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삶이, 나에게는 나의 삶이 있으므로

나는 엄마더러 삶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해왔지만, 실은 지금껏 엄마를 무시해온 것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에 대해 내가 본 것만, 내 기준에서 판단해왔다. 고백하건대 그동안 엄마를 할퀴는 말을 가장 많이 한 건 나다. 아빠한테 당하기만 한다고, 소처럼 일만 실컷 하고 만날 남 좋은 일 시킨다고, 나는 엄마처럼은 안 살 거라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둥이를 나불댔다.

시대가 있고, 사회라는 게 있다. 지금도 여성에게 달린 가부장제의 족쇄가 이렇게 많은데, 10년 전, 20년 전에는 그 족쇄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이제는 알겠다. 엄마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고 나니 그 맥락이 보인다. 엄마가 나를 키우기 위해 무엇을 포기했고, 무엇을 감수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용감했는지 말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엄마를 제대로 알아주기로 했다. 그 시작은 제대로 된 호칭을 붙여주는 일이다. 엄마는 그간 가족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나 생계부양자 같은 호칭은 남성에게만 명예롭게 주어졌다. 나는 여기에 대항해서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다고, 아니 살렸다고, 그녀의 노동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 엄마는 우리 가족의 생계부양자였고, 진정한 가장이었다고 말이다. 

인터뷰하면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죄책감이 옅어졌다. 애초에 내가 엄마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주제 넘는다. 내가 뭐라고?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다. 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왔다. 처음부터 나는 엄마의 구원자가 될 필요도, 될 수도 없었음을 이제와 깨닫는다.

푸념은 여전하다. 엄마는 지금도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내가 이혼한 거 열두 번 생각해도 잘했다” 하다가도 “내가 느그 아빠랑 살았으면 요래는 안 살았을 긴데” 하고 말해서 속을 뒤집어놓곤 한다. 그 속을 딸인 내가 어찌 다 알까, 엄마가 팔순쯤 되면 그때나 온전한 속마음을 들려줄까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대로 행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엄마가 바라는 것도 나의 행복이니까. 

이 인터뷰는 엄마의 불완전한 자서전이며, 우리 모녀가 상처를 함께 돌아본 첫 시도이며, 아직도 용서할 수 없는 아빠를 이해해 보려는 걸음이기도 하다.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어딘가에 나 같은 딸이 있다면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놓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들 말하지만 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최상의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 아무리 피를 나눈 사이라도 서로를 대신할 수는 없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삶이, 나에게는 나의 삶이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