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가장 높은 곳, 남김없이 옷을 벗었다

미국 3대 트레일 중 가장 길고 험하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하 피시티) 4300km. 미국 LA 문화단체 ‘컬쳐앤소사이티(대표 줄리엔 정)’ 기획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 한국 하이커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 기자말

월급날만 기다리던 직장인, 사표를 내다

담배를 태우던 과장님의 얼굴은 애써 태연한 모습이다. 비 오는 겨울 하늘에 담배 한 모금을 내뱉으며 내게 묻는다.

“언제까지 할 거야?” 
“한 달 반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종종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내 속마음을 터놓았던 과장님. 다음 날 나의 퇴사 소식은 사무실 모두에게 전해졌다. 그렇게 퇴사 과정은 약속이나 한 듯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나는 소위 대기업이라는 남들이 보기에 그럴싸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월급날과 휴일을 기다리는 순탄한 삶이었다. 심심치 않게 퇴사를 꿈꿨지만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고 용기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을 산책하다 갑자기 달리고 싶어졌다. 짧은 거리였지만, 땀을 흘리고 심장이 뛰는 것이 좋았다. 곧장 10km 마라톤 대회를 신청했다. 연이어 풀코스를 완주하고 중국 고비사막에서 열리는 250km 사막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했다. 

몇 번의 크고 작은 대회에 참가한 나는 아웃도어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더욱 뜨거워졌다. 폭풍 검색을 통해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이하 피시티)을 알게 됐다. 미국 서부 4300km를 종주하는 길. 이미 완주한 하이커의 강연도 듣고 직접 만났다. 그 이후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드디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됐다. 죽어가던 심장의 불씨도 타올랐다. 2017년 2월, 나는 7년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피시티로 떠났다. 

은박지 담요를 칭칭 싸매고 잠을 청하다

“Sunday morning, rain is falling(일요일 아침, 비가 내리고 있네요)!”

록 밴드 마룬파이브 노래 ‘선데이 모닝(Sunday Morning)’이 적막을 깨운다. 어둡고 좁은 텐트 안. 휴대전화 알람에 깨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한 줌 빛도, 어떠한 색도 존재하지 않는 암흑이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정신은 몽롱하다. 영하의 매서운 추위가 코와 광대를 찌른다.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고독한 설산.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야 내가 하이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잠시나마 현실을 부정하고 다시 침낭에 들어가 눈을 감은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셔 본다. 매번 그렇듯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침낭 밖으로 손을 삐죽 내밀어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한다.
 
‘2017년 6월 3일 토요일 밤 11시 30분’
 

미 서부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걸은 지 50일째. 1200km를 걸어 올라 드디어 휘트니산(Mt. Whitney) 바로 아래에 있다. 휘트니산은 피시티 루트에서 13km 남짓 벗어나 있다. 미국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있으며 높이 4421m로 미 본토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하늘과 더 가까워지길 원하는 하이커들이 꼭 들르는 곳이다.  

한 해 전 이곳에는 백 년 만의 한 번이라는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그 때문에 6월 한여름인데도 시에라 네바다는 성인 키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한낮 뜨거운 뙤약볕이 무색하게 해가 지면 주변은 영하로 떨어졌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반으로 두껍게 접어 몸통 부위에 받쳤다. 엉덩이부터 다리에는 빈 배낭을 깔았다. 체온을 보호하기 위해 우비를 포함해 가진 모든 옷을 입었다. 마지막으로는 응급상황용 은박지 담요를 온몸에 칭칭 두르고 침낭에 들어간다. 마치 알루미늄 포일로 포장한 김밥 한 줄같다고 할까. 휘트니산 일출을 보기 위해 오후 8시에 잠을 청했다. 

하지만 침낭 속은 금세 차가워졌다.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체온 때문에 은박지 담요 안에는 이슬이 몽글몽글 맺혔다. 침낭은 축축해졌다. 추위에 잠을 자다 깼다를 반복했다. 곧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굿모닝!”

하이커 파트너인 토마스는 먼저 텐트 밖에 나와 인사를 건넸다. 굿나잇, 밤 인사를 건네도 모자를 깊은 밤 12시. 우리는 등반을 시작했다.

휘트니산 달빛, 화려한 그림을 그리다
 
헤드 랜턴은 밤사이 얼어붙었던 어둠을 서서히 열었다. 우리는 그 빛을 따라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달빛이 걸음을 인도했다. 주변은 고요하다. 눈이 녹아 흐르는 강물 소리가 멀리서 아련히 들릴 뿐 그 어떤 미동도 없다. 눈 밟는 소리와 차갑고 거친 숨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인 우리는 이곳의 고요함을 돌려주며 정상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은 먼저 간 이들 덕분에 수월했다. 눈 속 깊게 패어 있는 발자국은 또 다른 길잡이였다. 휴대전화 위치추적 기능도 필요 없었다. 멀리 헤드 랜턴을 비추자 발자국 길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천상에서 지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드디어 본격적인 오르막이 보였다. 스위치백(지그재그로 반복되는 길) 형태 오르막을 수십 번 왔다 갔다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폐 속 깊숙한 곳에서 나온 숨은 뿌연 수증기를 뿌리며 휘트니산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선명했던 발자국은 어느샌가 사라졌다. 눈 덮인 가파른 경사만이 산 아래 길게 뻗어 있었다. 위험해서인지 다른 하이커들은 우회한 듯 보였다.

‘휘트니는 결코 우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구나!’

앞서 걷고 있던 토마스는 배낭 옆에 매달아 놓은 얼음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얼어붙은 가파른 눈길을 찍으며 오르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프랑스 파리 출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안식년 휴가 7개월을 받아 이곳에 왔다고 했다. 깊게 팬 눈과 살이 빠져 홀쭉해진 볼. 그리고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 덕분에 언뜻 예수를 닮았다. 공교롭게 생일마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는 친형이 게이라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자유를 사랑하는 파리지엥이었다.
 

나도 토마스를 따라 얼음도끼를 꺼냈다. 난생처음 사용하는 얼음도끼로 얼어붙은 눈을 부술 때마다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얼음과 쇠가 만나는 거친 파열음에 살아 있다는 느낌이 가슴 속까지 전해졌다. 수십 번의 설투(雪鬪) 끝에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숨을 고를 겸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이었다. 붓으로 흰 물감을 뿌린 것처럼 밤하늘 은하수가 은은하게 펼쳐졌다. 경쟁하듯 혼신의 힘을 다해 사방으로 빛을 내뱉는 별 무더기. 검정과 흰색만으로도 밤하늘은 화려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미국 최고봉에서 일출을 보다

새벽 5시. 등반을 시작한 지 5시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무수하고 육중한 돌덩이들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로울 것 같았던 정상은 예상과는 다르게 품이 넓었다. 

정상 높이 4421m. 찬 공기가 온몸에 파고들었다. 몸에 열을 내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다. 콧잔등 위까지 옷깃을 끌어 올렸다. 일출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대피소로 향했다. 그런데 대피소는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거대한 돌덩이 틈에 들어가 바람을 피했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끓여 몸을 녹였다. 
 

추위에 얼마나 몸을 떨었을까. 지평선 너머 불그스름한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학수고대하던 일출이다. 붉은 점 하나가 스멀스멀 올라오자 어둠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자리는 태양의 붉은 기운으로 바뀌어 갔다. 토라진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서광은 천천히 봉우리들을 감싸 안았다. 주변 만물은 헤엄치듯 그 품 안으로 들어갔다.

토마스와 나는 옷을 남김없이 몽땅 벗었다. 극한 추위가 온 신경을 따라 몸 구석구석 퍼졌다. 몸은 굳어갔지만 심장은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동쳤다. 붉은 피가 온몸 구석구석 흘렀다. 알몸으로 일출을 바라보며 휘트니산 등반은 그렇게 끝났다.   

그렇게 난 고층빌딩을 탈출해, 사막을 건너, 설산을 넘어, 5개월간 피시티를 걸었다. 지금은 30대 후반 나이에 미국 오리건주에서 비행 훈련을 받고 있다. 피시티를 걸을 줄 몰랐듯이 내 앞길에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른다. 그저 마음이 설레는 길로 한 발자국 내딛고 싶을 뿐이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일출이 떠오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