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 이완용의 취미, 기가 막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미술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전람회는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미술전람회(아래 조선미전)’와 서화협회가 개최한 ‘서화협회전’을 들 수 있다.

조선미전은 1922년 3.1운동 후 한국인의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문화정치의 한 방편으로 생긴 것이다. 곧 일본 제국주의의 선전도구로 시작된 최초의 공식적인 관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전람회를 통하여 일본의 미술이 유입되었으며, 또한 제국주의가 설파한 로칼리즘(향토색) 미술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조선미전 창설은 한 해 앞서 한국인들에 의해 설립된 서화협회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생긴 면도 있다. 1918년 결성된 서화협회는 보통 ‘한국 최초의 근대미술 단체’로 불리는데, 한국의 동양화가들과 서양화가들이 모여 결성한 것이다.

서화협회는 결성한 지 3년 후인 1921년 ‘서화협회전’을 개최하여 전통화와 서양화를 함께 전시한다. 이 전시는 한국미술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며, 한국 근대 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역할이 조선미전을 더욱 자극시켰다. 그러나 아쉽게도 1936년 일제의 금지령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서화협회의 태동, 윤영기의 경성서화미술원
                            

 
사실 서화협회의 시작은 오로지 평양 출신 서화가 옥경산인(玉磬山人) 윤영기(尹永基, 1835-1927경)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그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서화가이다.

그는 특히 난초 그림에 뛰어나 이하응의 난 그림을 대필한 정도로 명성을 날리던 이였다. 그는 대원군의 사랑을 받은 저명한 서화가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술 교육이란 면에 있어서도 체계적인 미술 교육의 방법론을 가진 특출한 교육자이자 미술 운동가이기도 하였다.

윤영기는 대원군이 세상을 떠나자 운현궁에 드나들며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미술교육 기관을 세우기로 결심한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찍부터 쌓아놓은 왕실과 고관대작들에게 접근하여 일을 도모한다.

특히 한일합방 이후 할 일이 없게 된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 1858-1926) 등 일부 매국 귀족의 협조와 후원을 받아 1911년 3월에 서울 중학동에 ‘경성서화미술원’을 설립한다. 그러니 한국인이 창설한 최초의 근대 서화교육 기관은 사실 서화협회의 모태가 된 이 윤영기의 ‘경성서화미술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완용의 경성서화미술원 강탈
                                           

윤영기의 주도에 의해 설립된 ‘경성서화미술원’은 발족 단계에서 약간의 재정적 후원을 하였던 이완용이 미술원 내부에 ‘서화미술회’라는 실질적 운영체를 만들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서화미술회의 회장이 된 이완용은 사실상 경영권을 빼앗아 결국 윤영기는 힘을 잃고 만다.

이완용은 창덕궁 왕실로 하여금 서화미술회의 운영 재정을 지원하게 하면서 서화를 즐기던 일부 귀족층을 서화미술회 회원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안중식과 조석진 등 당대 대표적인 서화가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윤영기가 만든 경성서화미술원은 이완용의 손에 들어가고, 결국 안중식과 조석진의 ‘서화미술회’가 되는 운명을 맞는다. 윤영기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경성서화미술원을 이완용에게 빼앗기고 상심한 윤영기는 노구를 이끌고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1913년 서화교육기관 ‘기성서화미술회’를 만든다. 그는 이때 이미 82세의 늙은 몸이었다. 이제 힘없는 늙은 몸으로 혼자 이끌어 갈 수 없음을 알고 김윤보, 김유탁, 임청계, 노원상, 양영진 등 평양 지역 서화가들을 참여시킨다.

윤영기는 주로 묵란을 가르쳤으며, 임청계와 노원상이 서법, 김윤보와 김유탁이 산수와 묵죽을 가르쳤다. 이곳은 특별하게 여학생도 받아들였는데, 주로 격조 있는 예기(藝妓)를 꿈꾸는 평양 기생들이었다.

서화미술회의 발전과 서화협회의 발족
         

조석진과 안중식을 앞세운 서화미술회 초기의 강습소는 중학동에 있었는데 곧 백목다리(지금의 신문로) 근처에 있던 큰 한옥 건물로 옮겼다가 1915년에 다시 관철동으로 옮긴다.

두 집 다 친일파 이지용 소유의 집이었다. 서화미술회는 ‘서과(書科)’와 ‘화과(畵科)’의 두 과로 나누어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수업 연한은 서화 전공별로 3년이었고, 수업료는 전혀 받지 않았다. 정규학생 이외에도 단기적인 교육을 받는 학생들도 있었다.

교수진은 당시 서화계의 대가였던 조석진과 안중식을 중심으로 강진희, 정대유, 김응원, 강필주, 이도영 등이었다. 이들의 교육 방법은 ‘고법(古法)’을 전수하는 방식이었으며, 학생들은 선생들이 여러 체본을 그려주면 그것을 일일이 임모한다든가 또는 중국 화보인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를 따라 그리는 방식이었다. 이따금 실물 사생을 하였으나 많지는 않았고, 주로 옛 화법에 따라 기초 훈련을 쌓는데 중점을 두었다.

서화미술회 출신의 대표적 화가로는 제1기생으로 오일영, 이용우, 제2기생으로 김은호, 제3기생으로 박승무, 제4기생으로 이상범, 노수현, 최우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1920년 이후 한국 근대 동양화단의 대표적인 화가들이 되었다.

서화미술회는 더욱 발전하여 1918년 서화협회를 결성한다. 서화협회는 안중식·조석진의 서화미술회가 1915년에 설립한 김규진의 서화연구회를 규합하여 설립한 단체이다. 특히 춘곡 고희동이 한국 미술계의 주체적 근대화와 활성화를 위해 미술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결성을 주도하였다.

당시는 일본인 서양화가들이 건너와 조선미술협회를 조직하고 미술계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때였다. 이 때문에 한국의 주체적인 미술단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단체 이름에도 미술이란 단어를 뺐다고 한다. 그러니 서화협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 단체라 할 수 있다.

서화미술회, 서화협회 회원들의 거주 공간 서촌

서화미술회가 있던 백목다리 근처는 신문로, 곧 지금의 조선일보사 뒤 어디쯤 되는 곳이었다. 당시 서촌에서 흘러내린 옥류동천이 내려가는 곳 어디쯤에 백목다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곳에 안중식과 조석진이 있었고,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서화미술회의 서예 선생이었던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7)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 당주동에 자신의 서실을 차리고 있었다. 또한 서화미술회의 졸업생이자 서화협회 회원인 서화가들은 주로 서촌 지역에 살았다.

또한 서화미술회 회장으로 있었던 이완용은 옥인동에 대 저택을 지니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서화미술회 회원들은 종종 이완용의 집에 가서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고 한다.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가 자신의 삶을 정리한 회고록 <서화백년>에는 한일합방의 주역인 이완용과 서화미술회와의 관계를 술회한 대목이 나온다. 당시 서화미술회에 출입하던 김은호가 곁에서 지켜보며 겪었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마치 지금의 현실처럼 생생하다.
 

“서화미술회는 1911년 3월 22일에 문을 열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심이 흉흉하던 터라 일제는 소위 문화정책을 내세워 이왕직과 손잡고 서화미술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합방에 공이 컸던 일당 이완용을 교장격인 회장 자리에 앉혀 놓았다. 일당은 매국노 소리를 듣던 때라 어디 가나 반기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글씨도 잘 쓸 뿐 아니라 그림에도 취미가 있어 서화미술회에 나온 것이다. 한 마디로 취미도 살리고 말벗도 찾자는 의도였다. 총독부는 총독부대로 그를 내세워 서화에 취미가 있는 선비, 소위 문화계 인사를 포섭하자는 내심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당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서회미술회에 나와 앉아 있다 가곤 했다. 단아한 체구였지만 다부지게 생겼었다. 어떻게 보면 눈이 부리부리한 게 독하게도 보였다. 나와 무호 이한복, 정재 오일영, 농천 이병희 등은 한동안 효자동의 일당(一堂) 집에 다니면서 붓글씨를 배웠다. 그는 우리들을 말동무로 불러들였다. 일당은 당시 귀족들 중에서는 가장 붓글씨를 잘 썼다. 그러나 일본 서도전람회 미술전에 출품했지만 입선도 못했다. 성당 김돈희, 해강 김규진, 석정 안종원과 함께 냈는데 성당과 해강만 입선했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일당 이완용이 겪은 노년의 삶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완용의 집은 당시 서양식으로 지은 대형 2층집이었는데 호화롭기로 유명하였다. 지금도 그의 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집이 그 자리에 있는데 외형만 약간 손질했을 뿐 골격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근처가 모두 그의 집터였다고 하나 이제는 그 저택만 남고 주변 필지는 모두 분양되어 옛 모습을 잃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살던 집은 여전히 그 위용을 보이고 있어 당대 그가 가진 위세를 짐작케 한다. 1910년에는 나라를 일본에 넘기고, 1912년경에는 윤영기로부터 경성서화미술원을 빼앗아 미술계의 제왕 노릇을 한 이완용의 모습을 생각하면 한 인물의 역사적 평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완용의 뛰어난 글씨 솜씨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칭하지만 글씨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잘 썼다고 한다. 재능이 뛰어난 서화미술회 학생들이 배우러 다닐 정도였다. 현재 전하는 글씨들을 보면 어느 하나 허튼 것이 없다. 그의 글씨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재주꾼의 글씨이다. 기교가 너무 승하여 빼어난 기교를 보이나 독창적인 예술 작품으로서는 품격이 높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글씨는 붓놀림이 재빠르고, 세련된 맛이 있고, 글자간의 크기 차이도 자유롭다. 크고 작은 글씨를 조화롭게 굵은 선과 가는 선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진득한 글씨를 쓴다기보다는 뛰어난 기능을 지닌 빼어난 테크니션이다.

그래서 어떤 글씨는 매우 예뻐 애교를 느낄 정도이고, 획을 길게 빼어 쓴 글자의 마지막 획은 그의 능청맞은 성격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특히 자유로운 구성을 바탕으로 쓴 큰 글씨가 그럭저럭 좋으며, 간찰 등에서 보이는 잔글씨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서화미술회의 흔적을 보여주는 병풍 한 틀
          

한국 미술 근대화 주역 중의 한 명인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 1853-1920)이 산수화를 그리고 천하의 역적 이완용이 화제를 쓴 <산수화 10폭 병풍>이다. 참으로 보기 드문 병풍이다.

191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병풍에는 조석진이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고, 각 폭 모두에 이완용이 특유의 필체로 화제를 썼다. 이완용이 남의 그림에 화제를 쓴 것은 그리 흔치 않다. 그는 학부대신을 역임한 명사인데다가 을사오적이란 지탄을 받고 있던 터라 자유로이 화가들과 어울리지 못한 탓도 있다.
       

이 두 사람이 합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화미술회가 매개가 되어서이다. 이완용은 서화미술회의 회장을 하였으며, 서화협회의 고문을 맡게 되었다. 이때 화가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이때 조석진은 서화미술회의 화과 선생으로 안중식과 함께 좌장 역할을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듯하다. 조석진은 전형적인 중국풍의 그림을 치밀하게 그린다. 상대가 이완용인 것을 의식하였는지 성의를 다하여 산수 10폭을 화려하게 그렸다. 이완용은 각 폭 모두에 한시 한 편씩을 적는다.
 
사실 규모가 큰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이 합작한 행위는 예술적으로 큰 성과를 거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조석진도 본래 자신이 추구하는 양식에 비해 훨씬 여리면서도 아름답게 풍경을 그렸다. 일반적인 자신의 과감한 필선에 비하면 다분히 얌전하고 여성적이다. 이완용의 글씨 또한 극단적으로 다듬은 행초서를 썼다. 조석진의 화려한 그림에 맞추어 다양한 기교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그림과 글씨는 서로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조석진의 그림이 그답지 않게 복잡하고 화려한데다, 이완용의 글씨 또한 빼어난 잔 기교로 그림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복잡한 구성의 그림에 비해 글씨가 너무 작을 뿐 아니라 글자의 조형조차도 한데 녹아들지 않는다.

화제의 자리 배치도 잘 맞지 않는다. 그림에 어울리지 않게 자리 배치를 한 이완용의 무성의가 눈에 거슬린다. 역시 거장 두 사람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한다는 것은 서로 간의 배려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