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거는 안 만들어요… 맥주를 아는 사람들은 익선동에 간다

 
서울 익선동과 조금 떨어진 곳. 종묘 너머 고즈넉한 돌담길을 걷다 보면 남색 기와를 얹은 아담한 한옥 한 채가 보인다. 크래프트 맥주 펍 ‘서울집시’다. 한옥과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낡은 공장 같은 느낌의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룬 가게 내부는 따뜻한 색의 조명과 벽 곳곳에 붙은 포스터들이 어우러져 자유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인테리어에는 이현오 대표의 취향이 담겨 있다. 타일, 페인트, 가구, 소품 하나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손님이 가벼운 생각으로 자유롭게 왔다 가길 바라는 마음이 엿보인다. ‘서울집시’라는 이름처럼 말이다. 이곳은 6명 이상의 단체 손님을 받지 않는다. 시끄러움이 극에 달할까 우려하지 않아도 좋다.
      
서울집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실험적인 맥주를 선보이는 곳이라 할 만하다. 유수의 국외 양조사들이 찾는다. 적어도 아시아에서 유명한 양조사들은 이곳을 방문한다.

서울집시는 집시 브루잉(Gipsy Brewing)을 통해 맥주를 생산한다. 집시 브루잉이란, 직접 양조장을 두지 않고 다른 양조장을 빌려 맥주를 생산하는 방식을 말한다. 대량 생산을 통해 수지타산을 맞출 필요가 없다. 소품종 생산을 통해 획기적인 맥주를 개발하고,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때문에 맥주 리스트도 자주 바뀐다. 다른 양조장과 콜라보레이션도 활발하다. 10여 곳의 국내 양조장과 협업한다.
      
서울집시만의 매력
 

 
서울집시의 색깔은 확실하다. 4~7도 사이의 저도수 맥주를 선보인다. 또 사워 에일(Sour Ale)을 주로 내놓는다. 신맛을 잘 다룬다는 이야기다. 서울집시의 뚜렷한 색깔은 직원들의 취향이기도 하다. 주방장을 제외하곤 직원 모두가 양조사 출신인데, 이들은 산미가 강하고 가벼운 도수로 술술 넘어가는 맥주를 추구한다.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맥주는 선보이지 않으려 한 게, 개성이 뚜렷한 맥주 개발로 이어졌다.
     
지난 6월부터는 히말라야 핑크 소금과 망고, 야생 효모 브렛(Brett)을 넣어 만든 ‘마링고’를 선보이고 있다. 마링고(마리+망고)는 이 대표가 망고를 좋아하는 애인 마리(별명)씨에게 고백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향긋한 향을 위해 발효 후 홉을 추가로 첨가하는 과정을 거친다. 드라이 호핑이다. 여름에 어울리는 신맛과 묵직한 과일 향이 매력이다.

이곳은 수입산 재료에만 의존하는 수제 맥줏집과 다르다. 토종 국산 재료를 활용한다. 이 대표는 “뒷동산에서 채취한 효모로 만든 뒷동산에일, 복분자와 요구르트를 혼합해 만든 복분자 IPA 등 국산 재료를 통한 새로운 색깔의 맥주를 만들어왔다”고 전한다.

보통 수제 맥주가 14~15일 숙성 시간을 갖는 것에 반해, 이곳 맥주는 30일 정도를 거친다. 숙성 기간은 길지만 맥주 리스트는 계속해서 바뀐다. 대략 45일 전후다. 이론적으로 한두 달 정도면 다른 맥주를 먹을 수 있다는 거다. 서울집시 맥주의 기본 철학을 느끼면서 말이다.

음식 또한 독특하다. 고수 베이스의 음식을 선보인다. 고수를 잘못 쓰면 음식과 어우러지지 않고 고수 특유의 향이 도드라지기 쉬운데, 고수와 음식이 하나로 녹아든다. 
 

 
“맥주는 마시기 편해야 한다. 손님이 취해서 가면 안 된다. 그래서 더 달라고 하셔도 죄송한데 다음에 드셨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취객도 안 받는다. 낮은 도수의 맥주를 내놓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현오 대표는 서울집시의 맥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맥주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맥주에 대한 그의 철학을 좀 더 들어보았다.

내가 먹고 싶은 맥주를 만든다
 

– 어떻게 창업하게 됐나.
“원래 맥주 만드는 일을 했다. 양조사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맥주를 만들면 ‘맛있지만 아직은 이른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아직 대중에게 먹히지 않을 것 같다는 뜻이다. 사내 대회에서도 자주 1등 했지만, 대중과 거리가 멀다는 이야길 듣곤 했다. 내가 먹고 싶은 맥주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왔다.”
 
– 집시 브루잉을 하는 이유가 뭔가.
“양조장 운영은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투자받아야 하는데, 투자자는 바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대중성을 원한다. 돈을 벌고 싶어 하니까. 그게 중요하긴 하지만, 내게 중요한 건 만들고 싶은 맥주를 만드는 거다. 자본이 들어오면 그 취지가 훼손된다. 결국 집시 브루잉을 하는 건 실험적인 걸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어떤 이유에서 실험적인 걸 추구하는 건가.
“대중적인 맥주는 아무래도 큰 회사가 더 잘할 수밖에 없다. 서울집시의 타깃은 니치마켓(틈새시장)이다. 틈새를 노림으로써 세계 시장에 다가간다는 생각이다. 틈새도 세계로 보면 꽤 크다. 뭐랄까, 대중적인 마켓은 당연히 마케팅 비용이 중요하다. 돈으로 돈을 버는 시장이다. 틈새시장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곳이다. 어느 나라든지 다 ‘맥덕'(맥주 덕후)이 있지 않나.”
 
–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려 하나.
“예를 들면 ‘한국의 서울집시는 막걸리에 쓰는 효모를 이용해서 맥주를 만들었대’라는 식으로 이슈가 된다. 왜냐면 아무도 안 하는 거니까. 미국 친구들이 이런 걸 할 순 없지 않나. 얼마 전에 전라도 복분자를 이용해서 만든 ‘복분자 IPA’도 비슷한 예다. 한 달 전에도 다른 나라에 샘플을 보냈다.”
 
– 국외 진출을 염두에 두는 건가.
“처음부터 그걸 노렸다. 국외 시장은 특이한 게 먹힌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맥주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 우리 맥주는, 맥주를 많이 안 드시는 분들껜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맥덕들은 좋아한다. 애초에 타깃을 광범위하게 잡지 않았다. ‘프리미엄 마켓’을 노리는 거다. 서울집시가 원하는 것도 미쉐린 가이드에 나올 법한 레스토랑에 어울리는 맥주를 만드는 거다.”
 
– 진출하고 싶은 국가가 있나.
“덴마크다. 다이닝 분야에서 요즘 제일 ‘핫한’ 나라다. 가장 주목받는 미쉐린 식당도 덴마크에 많이 있다. 맥주 시장도 그렇다. 덴마크가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시장 자체가 굉장히 오픈 마인드다. 반면 독일은 보수적이다. 사람들이 독일 맥주가 되게 잘나간다고 생각하지만, 엄청 후퇴하고 있다. 트렌드를 못 쫓아온다. 좋게 말하면 장인 정신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발전이 없는 거다.”
 

 
– 외국 분들은 많이 오나.
“신기하다. 정말 많이 온다. 아시아 맥주 업계 관계자는 진짜 다 온 것 같다. 우리 가게에 오면 ‘나 어디 양조장의 누구다’라는 대화가 오간다. 국외 시장에서 우리가 알려지고 있는 거다. 서울집시를 시작하며 설정했던 목표는 이룬 셈이다. 최근에도 홍콩 업계 관계자들이 방문했다.”

– 주기적으로 맥주를 바꾸는 이유가 뭔가. 혹시 연중 판매하고 싶은 맥주는 없나.
“국외 맥덕들을 사로잡고 싶어서다. 맥덕들이 집시처럼 들를 수 있는 곳이 서울집시였으면 한다. 나도 맥덕이라, 외국에 가면 어디 맥줏집을 가야 할지 고민한다. 다양한 맥주를 선보이고자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당연히 일년 내내 팔고 싶은 게 있다. ‘필살기’라고 할 만한 맥주다. 실험만 많이 해봤다. ‘서울몽’이라 이름 붙였다. 우리의 꿈을 담았다. 그런데 언제 내놓을진 모르겠다.”
 
– 구상 중인 맥주가 있나.
“안동에서 나는 ‘하귤’과 ‘제피’로 만든 맥주다(최근 ‘코 끝에 여름’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됐다). 하귤은 여름에만 나는 귤이다. 제피도 유월 말에서 칠월 초쯤 2주 동안 난다. 엄청 좋은 재료라 하긴 어렵다. 다만 로컬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적어도 우리 맥주를 마신 사람은 ‘하귤이 여름에만 나는 귤이구나’, ‘제피가 경상남도에서 6월 말쯤에 나는 재료구나’ 하고 알 수 있다. 이건 의미 있는 일이다. 지역사회에도 선순환을 가져온다.”
 
– 외국산 재료가 더 맛을 내는 데 좋다 하더라도 국산 재료를 쓸 건가.
“로컬 재료가 제철일 땐 꼭 써보려고 한다. 3월에 출시한 ‘임금님표 BRTU IPA’도 이천 쌀을 이용해 만들었다. 솔직히 이천 쌀보다 수입 보리를 쓰는 게 맛이 훨씬 좋다. 약간의 맛을 포기한 이유는 문화와 지역 사회 발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료를 고르기 위해 실험도 많이 한다.”
 
– 어떤 식의 실험인가.
“일하듯이 먹으러 가고, 놀러 간다. 이럴 때 내 머릿속으로 많은 게 들어온다. 놀이와 일을 동시에 잡는 방식이다. 내가 즐거워야 마시는 사람도 즐거울 거라 생각한다.”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다
 

 
– 신 맥주를 많이 만드는 이유가 있나.
“그걸 제일 잘하기 때문이다. 좋아하기도 하고. 매번 사워 맥주만 만드는 건 아니지만, 앞서 얘기했듯 좋아하는 걸 잘하게 된다. 그게 신념이다. 누군가 내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다른 걸 만들긴 싫다. 그런 방법이 대중성은 얻을 순 있어도 최고가 되는 길은 아니다.”
 
– 음식에 고수를 많이 사용한다.
“일종의 진입장벽이다. 우리 음식이 고수를 못 먹는 분들껜 안 좋은 평을 받는 걸 안다.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국적인 걸 추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좋아하지 않는 분들껜 일부러 추천해 드리지 않는다. 우리 맥주가 향이 강한 편이라, 고수와 잘 어울리는 것도 있다.”
 
– 서울집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진 않는다. 매니악하지만 누군가는 엄청나게 좋아할 만한 것들을 만들고 싶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게 싫다. 우리 맥주는 대중적이지 않지만 대기업스럽지도 않다. 우리가 라거까지 만들 필욘 없다.
 
맥주는 예술이다. ‘몸에 흡수되는 예술’ 말이다. 맥주라는 매체로 메시지를 보내는 거다. 그래서 레시피를 구성할 때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스토리를 입히고 싶다. ‘우리 문화’를 말하고 싶다. 로컬 재료를 많이 쓰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게 우리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일이다.”
 
– 서울집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꿈꾼 대로 살아간다.’ 우리의 슬로건이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하다. 그래야 결과물도 좋다. 우릴 보고 누군가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