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무임승차'… 왜 그들은 항상 '돌봄'을 받기만 할까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한 행위이자 모든 인간의 권리 중 하나이다. 노동(한국의 경우 ‘장시간’ 노동) 때문에 삶이 고단하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성장통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노동은 인간 삶의 필수로 인식된다.

‘노동하는 삶’, 그에 비해 ‘돌보는 삶’이라는 어구는 왠지 어색하다. 돌봄은 양육이나 돌봐져야 할 특정시기 혹은 그것을 해야하는 특정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일 뿐, 모든 이의 해당사항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지난 9월 17일(화)에 열린 “독박도 기생도 아닌, 진짜 돌봄을 찾아서” 강의는 그 어색함을 정확하게 꼬집는 강의였다.
  

 
돌봄, 인간의 조건이자 삶의 근간

자본주의는 노동하는 인간을 표준으로 내세우지만 노동하는 인간이 노동할 수 있게 하는 돌봄은 공기처럼 무시한다. 노동현장에 나서기 전에 밥을 먹게 하고 깨끗한 옷을 입게 하는 것은 돌봄이다. 즉, 돌봄은 노동을 완성한다. 뿐만 아니라 돌봄은 태어남과 죽음 그 이상까지 걸쳐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누군가의 손길과 관심 아래에 있다. 고독사를 할지라도 사회복지사의 손길을 거치며 죽어서도 제사 등의 돌봄을 받는다. 즉, 돌봄은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조건이자, 삶의 근간이다.

강의에 의하면, 영국 사회학자 마샬이 이야기한 시민권은 ‘노동하는 독립적 성원’을 전제로 삼는다. 여성주의자들은 마샬의 시민권 정의를 비판했다. 전체 인생을 놓고 볼 때 인간은 ‘타인의 돌봄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상호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든 돌봄 수혜자라는 자각이 시민권에 기입되어야 한다. ‘공’과 ‘사’라는 이분법 속에서 사적영역으로 치부되어 주변화 된 돌봄을 정치적 의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돌봄의 속성은 관계 맺고 책임지며 함께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토대이기도 하며 민주주의 그 자체를 드러내기도 한다. 돌봄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돌봄 책임의 분배가 절실하다. 즉, 누구에게 돌봄 책임이 과잉 부담되는지, 누가 돌봄 책임에 불참하면서 특권을 갖게 되거나 효과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지를 파악해 기울어진 돌봄 운동장을 수평적으로 다지는 일이 시급하다.

강의에서 송다영 교수는 민주주의의 세 가지 원칙인 ‘자유-평등-정의’의 개념을 돌봄의 관점으로 재해석했다.

첫째, 자유는 ‘누가 돌봄으로부터 무임승차했는가?’라는 비판을 기점으로 재구성된다. 현재의 성별화된 돌봄을 비판하며, 마치 자유가 돌봄을 하지 않을 자유로만 오해되고 돌봄을 더 ‘낮은’ 노동으로 평가하는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 둘째, 평등은 ‘누구든 평등하게 돌봄을 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바탕이다. 즉, 모든 시민이 계층 인종, 성별, 가족배경과 상관없이 동등하게 돌봄에 접근하고 혜택을 누리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의는 ‘기존의 돌봄을 둘러싼 구조적 부정의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의 문제라고 말한다. 돌봄의 불평등이 공적 영역의 불평등으로 재생산 및 악화되고 있는 건 아닌지 되짚는 노력을 강조했다.
 

 
돌봄정책 : ‘돌봄의 성별화’는 여전히 존재한다

돌봄 민주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돌봄정책은 어떨까? 강의자료에 의하면 지난 13년간 영유아 돌봄정책은 노무현 정부를 기점으로 보육교육료지원, 아이돌봄서비스, 영아종일제도, 양육수당, 육아휴직제도 등으로 확대됐다. 이는 기본적으로 돌봄을 가족에서 기관보육으로 이전하고 가족 내에서도 돌봄의 질을 향상할 수 있게 도왔다.

한편, 돌봄의 사회화(무상보육, 양육수당 보편적 적용)는 이루어지고 있으나 돌봄의 성별화는 변화가 없다. 2016년 맞춤형 보육정책 같은 경우 일하는 엄마에게는 12시간 종일보육을 제공하지만 일하지 않는 엄마에는 6시간 맞춤보육만을 제공한다. 또한, 양육수당을 받으려면 집에 누군가가 상주하며 양육을 담당해야 하는데, 여전히 엄마-할머니가 주로 그 역할을 맡고 있는 현실이 떠올랐다. 여기까지만 봐도 남편 혹은 아버지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고, 여성이 돌봄 당사자임을 상정한 한국 정책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돌봄정책은 계층 및 가족구성에 따른 돌봄의 차등을 메우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육아휴직제도는 여전히 정규직 혹은 공무원 위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보육정책에 대한 예산이 많이 투여되지만 오히려 기관 이외의 개인서비스(베이비시터, 조부모 등) 병행 이용이 증가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계층의 돌봄 격차가 점차 아득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고소득-고학력 계층은 시장과 조부모 지원에 있어서 더 용이하며 기관을 이용하지 않을 때는 양육수당도 수급 받는다. 반면 저소득계층은 시장 이용, 조부모 지원도 모두 용이하지 않을 때가 많다. 즉, 무상보육에도 불평등한 돌봄과 양극화가 지속되고 있다.

돌봄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사회적 돌봄 일자리의 성별화와 ‘낮은’ 노동조건이다. 돌봄 영역에서 종사하는 여성들은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지만 막상 돌봄을 받아야 하는 시기에 돌봄 서비스를 구매할 경제적 능력이 안 될 때가 많다. 
 
돌볼 자유 중심으로 노동 재구성 하기

누군가는 평생 돌봄을 주기만 하고 다른 누군가는 돌봄을 받기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성별과 계급에 따라 반복적으로 연출되는 것이다. 답답함이 밀려왔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선 결국 다수가 함께 돌봄 책임을 나눠야 한다는 생각이 강의 내내 떠나지 않았다. 돌봄을 몸소 체험하고 실현할 때 돌봄이 인간의 기본 권리로 향유되고 진정한 민주주의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돌봄 책임을 과연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그 어려움에 더 깊이 고민하게 된다. 1인 가구/비혼 가구가 늘어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과거의 유사-가족 생활공동체로의 회귀는 너무나도 아득하게 느껴진다. 돌봄의 과정은 길고도 깊다. 생활공동체를 이루지 않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돌봄의 길고 깊음을 같이 공유할 수 있을까? 공유할 수 없다고 하면 돌봄을 결국 국가에 전임할 수 밖에 없는 걸까?

강사 송다영 교수는 강의 전반에 걸쳐 노동시장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다운(돌보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하셨다. 삶의 관점에서 본다면 삶과 돌봄은 동일하고 노동은 삶의 부분이자 돌봄의 부분인 것이다. 노동하는 사람이 돌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돌볼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더 많이 향유할 수 있게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등 누구나 생활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설령 임금노동하지 않더라도 존중받고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복지체계를 재현하는 것… 돌봄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발걸음은 결국 돌봄와 톱니바퀴 처럼 맞물려 있는 노동을 재구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