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 김구가 숨어든 산속 마을 "지금도 백범 덕분에"

 
삼일절에 이어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다. 김구 선생이 떠오르는 이유다. 백범 김구(1876-1949)는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쳤다. 우리 겨레의 큰 스승으로 통한다.
 
김구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선봉에 섰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믿었다. ‘아기 접주’라는 별명도 얻었다. 교육자로서 애국 계몽운동도 펼쳤다. 신민회 사건에 연루돼 15년 형을 선고받고, 4년간 옥살이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문지기’를 자처했다. 경무국장을 맡았다. 이어 국무령, 주석으로 일하며 항일에 앞장섰다. 한인애국단을 조직, 일제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했다. 한국광복군을 창설, 미국·영국 등 연합군과 공동작전도 폈다.
 
해방이 되자 11월 조국에 돌아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었다.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하지만 자주 독립국가, 통일정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친일, 반민족·반통일 세력의 흉탄을 맞았다. 1949년 6월 26일의 일이었다. 
 

   

 
지난 6일. 백범의 옛 자취를 찾아 기러기재(雁峙)를 넘는다. 목적지는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이다. 마을 입구 몇 군데에 ‘백범 김구 선생 은거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쇠실마을은 안동 김씨 집성촌이다. 한때 500~600명이 살았다. 2번국도 너머의 넓은 땅을 경작하는 ‘부자’들이었다. 지금은 50여 가구, 100여 명이 살고 있다. 넉넉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다래(키위)를 많이 재배해요. 마을 주변에 다래밭이 지천입니다. 5월 중순께부터 꽃이 피는데, 그때는 마을이 꽃동산으로 변해요. 주민들도 바쁘죠. 암꽃에다 수꽃가루를 일일이 묻혀주는, 인공수분 작업을 해야 하고. 가지치기도 해야 하니까요. 여름까지 계속해요. 그 사이에 모내기도 해야 하고요.”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최중식(69) 이장의 말이다. 덕분에 주민들의 주머니는 두둑한 편이다. 마을사람들이 즐겁게, 부지런히 일한다.
 
“다른 마을보다 여유있게 사는 편이죠. 빚은 커녕, 집집마다 약간의 비자금을 두고 살 겁니다. 농협의 영농자금도 덜 써요. 거의 안 써요. 살기 좋은 동네입니다. 공기도, 풍경도 기가 막히잖아요. 향우들 중에는 판·검사, 교수, 교사들이 많아요. 주민들끼리도 얼굴 붉히는 일 없이, 화기애애하게 살고요.”
 
최 이장의 마을자랑이 계속된다.
 
마을회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임홍남(73) 어르신이 흥에 겨워 부르는 나훈아의 ‘후회’다. 함께 있던 주민들이 박수를 치며 호응하고 있다. 
 

  

 
백범이 쇠실마을을 찾은 때는 1898년 음력 5월이었다. 이름도 ‘김구’ 아닌 23살 청년 김창수였다. 대동강변에서 일본군 장교 쓰치다(土田)를 맨손으로 죽인, 치하포 의거로 붙잡혀 인천감리서에 갇혔다가 탈출한 직후다. ‘감옥에서 죽는 것은 왜놈들에게만 좋은 일’이라는 게 탈옥의 이유였다. 쓰치다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하수인이다.
 
‘도망자’ 신세가 된 김창수는 삼남지방을 전전했다.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생활을 한 것도 이때였다. 산 깊은 마을을 찾아다니다 숨어든 곳이 쇠실마을이다. 안동 김씨 종친인 김광언의 집을 찾았다. 이름도 ‘김두호’라는 가명을 썼다.

그는 이 집에 40여 일 머물면서 마을사람들의 독립의식을 드높였다. 우리 역사도 가르쳤다. 마을사람들도 남다른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선생은 종친 어르신들과 시국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마을사람들한테는 중국 역사가 아닌, 우리 역사를 가르쳤고요. 민족정기를 일깨우면서 독립의식을 고취시킨 거죠. 짬이 나면 뒷산에 올라 체조를 하고, 바위 밑으로 흐르는 물에 멱도 감았다고 하고요. 이 집을 떠날 때 비로소 ‘내가 일본사람을 죽이고 피해 다닌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신이 보던 책 ‘동국사기(東國史記)’를 선물했는데, 속에 이별을 아쉬워하는 한시 한 수가 적혀있었다고 해요.”
 
김광언의 증손자 김태권(74) 어르신의 말이다. 김 어르신은 교사로 일하다 퇴직했다. 평일엔 이 집에서, 주말엔 광주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별하기 어렵구나 이별하기 어렵구나/ 헤어지는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는다/ 꽃 한가지를 반씩 나누어 한 가지는 종가에 남겨두고 떠나네/ 이 세상 살아 언제 만날 것인고 이 강산을 떠나기 또한 어렵구나/ 넷이 함께 놀기 한 달이 넘었는데 일이 어긋나 아쉽게 헤어지며 떠나는구나’
 
마을을 떠나면서 그가 남긴 한시 ‘이별난’의 일부분이다. 
 

   

 
청년 김창수가 머문 집에는 지금 자목련이 활짝 피어있다. 꽃잔디와 어우러진 장독대도 단아하다. 마당엔 천리향과 철쭉이 꽃망울을 머금고 있다. 텃밭에선 수선화, 금낭화, 할미꽃이 소담스런 꽃을 피웠다. 작약, 접시꽃도 보인다.
 
당시 두루마기 차림의 김창수가 마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하던 사진이 전해지고 있다. 집의 구조나 마당이 사진 속 풍경과 같다. 지붕만 초가에서 기와 모양의 슬레이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대숲이 감싸고 있는 주변 풍광도 옛 모습 그대로다. 그 마루에 선생이 앉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집 앞에는 백범 김구 은거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도 있다. 1990년과 2006년에 들어섰다. 한옥 형태의 조그마한 기념관에서 선생의 일생을 엿볼 수 있다. 쇠실마을에서 지낸 이야기가 담긴 ‘백범일지(白凡逸志)’도 복제본으로 만난다.
 
“김구 선생 덕분이야. 외지사람들이 찾아오는 건…. 누가 이 산골까지 오겄소? 김구 선생이 숨어지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그걸 찾아오는 거지.”
 
기념관 윗집에 사는 ‘배실댁’ 안금순(82) 어르신의 말이다. 산중 마을이 알려지고, 외지사람들이 찾아오는 건 백범 김구 덕이라는 얘기다.
 

   

 
김구가 쇠실마을을 다시 찾은 건 1946년 9월, 선생의 나이 71살 때였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담은 한시를 남기고 떠난 지 48년 만이었다. 이름도 ‘김두호’가 아닌,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였다.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솔문을 세우고 따뜻한 마음으로 환영했다. 솔문은 환영이나 축하를 위해 나무기둥을 솔잎으로 감싸서 만든 문을 가리킨다. 그는 마을을 다시 찾아 ‘감격에 넘치었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
 
김구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쇠실마을에 머문 기간은 두 차례, 40여 일이었다. 일생에서 그다지 길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짧은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작은 은혜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전했다. 마을사람들도 그와의 만남을 귀하게 여겼다. 그 두 마음이, 지금 마을에 활짝 핀 노오란 개나리처럼 화사하고 예쁘다.
 

   

 
주변에 가볼만한 데도 지천이다. 전통 한옥마을인 강골마을이 멀지 않다. 광주 이씨가 모여 사는 마을의 이용욱 가옥과 이금재 가옥, 이식래 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연못과 어우러진 정자 열화정도 멋스럽다. 전라남도 민간정원으로 지정된 초암정원도 지척이다. 추억의 거리가 있는 득량역도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최대성 장군을 배향하고 있는 충절사도 가깝다. 정유재란 때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 장군이 많은 군량미를 확보한 박곡마을과 고내마을도 득량면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