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서 자격증 1호 취득자의 현재

(*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이 땅 한반도에서 ‘사서’ 직함을 달고 가장 먼저 일한 사람은 누구일까?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기준으로 삼으면 1923년 경성부립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 ‘사서’로 이름을 남긴 우에스기 나오사부로(上杉直三郞)와 시부에 케이조(澁江桂藏) 두 사람이다. 우에스기 나오사부로는 1922년 10월 5일부터 1927년 5월 10일까지 경성부립도서관 2대 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886년 아오모리현(靑森縣)에서 태어난 우에스기는 1912년부터 1922년까지 조선총독부 ‘제생원’에서 훈도로 일했다. 제생원은 고아와 장애인을 위한 특수 교육시설이다. 경성부립도서관장으로 재직한 후 직업소개소장을 거쳐 1935년 5월에는 경성부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했다. 

한반도 최초의 ‘사서들’ 
 

 
‘사서’ 직함을 달지는 않았지만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는 일찍부터 조선 도서관 분야에서 일한 인물이다. 1883년 시코쿠(四国) 에이메현(愛媛縣)에서 태어난 오기야마는 1909년 교토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1912년 7월 일본 문부성이 개최한 도서관 강습회를 수료하고, 교토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일하다가 1914년 조선으로 건너와 이왕직 ‘도서실’에서 촉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그는 1917년 중추원, 1921년 조선총독부에서 촉탁으로 일했다. 조선사(朝鮮史)와 교과서 편찬에 깊이 관여했고, 이런 경력을 인정받아 1923년 11월 조선총독부도서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45년 해방 때까지 22년 동안 조선총독부도서관장으로 일했다. 오기야마 히데오는 도서관 교육과 근무 경험을 가지고 이 땅에서 일한 최초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는 <반도사>(半島史) 편찬을 추진했는데, 오기야마 히데오는 <반도사>에서 ‘중세사’를 담당하는 필진이었다. 1923년 일제는 정무총감을 총재로 하는 ‘조선사학회'(朝鮮史學會)를 결성하는데, 오기야마는 훗날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초대 관장이 되는 오구라 신페이와 함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일제는 조선역사를 왜곡해서 집필하고 식민사관을 정립하는 데 기여한 사람을 식민지 조선의 도서관 책임자로 배치했다. 이런 경향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일제가 도서관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만철경성도서관(철도도서관) 개관 실무를 맡았던 하야시 세이치(林靖一)도 눈여겨볼 인물이다. 1894년 시가현(滋賀県)에서 태어난 하야시는 1913년 조선총독부 철도국 고원으로 출발, 철도도서관의 관장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하야시 세이치는 1920년 7월 21일 만철경성도서관을 개관했고 1922년부터는 관장으로 일했다. 만철경성도서관 개관을 앞두고 하야시는 1919년 일본 본토의 여러 도서관을 견학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와다 만키치(和田萬吉)가 6일 동안 진행한 도쿄제국대학 공개 강연회에 참여했다.

와다 만키치는 27년 동안 도쿄제국대학 부속도서관장으로 재임하면서 문부성 도서관원교습소 설립을 주도한 사람이다. 그는 제국도서관 초대 관장이자 일본문고협회(일본도서관협회의 전신) 초대 회장인 다나카 이나기(田中稻城)와 함께 일본 도서관의 선구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하야시 세이치가 만철경성도서관을 개관하던 시점에 해당 도서관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소속이었기 때문에 하야시는 1924년 이전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하야시가 도입한 ‘안전개가제’가 일본 제국 최초의 개가제로 꼽힌다는 것은 철도도서관 편에서 언급했다(관련 기사 : 일제의 ‘만철’은 왜 도서관을 운영했을까).

식민지 조선의 일본 도서관인
 

 
내친김에 ‘식민지 조선의 3대 도서관’으로 꼽힌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살펴보면,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를 시작으로 오타니 가즈마(大谷勝眞), 후나다 쿄지(船田享二), 다카기 이치노스케(高木市之助), 토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까지 다섯 명의 관장이 거쳐갔다.

초대 관장 오구라 신페이는 이두를 해석한 최초의 학자로 향가와 조선어 방언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유일한 법학자인 후나다 쿄지는 패전 후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3선 의원이 되고 중의원 의장을 맡기도 했다. 다카기 이치노스케는 일본을 대표하는 고전문학자 중 하나다. 도리야마 기이치는 발해사를 비롯한 중국사 연구로 인정을 받았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장을 역임한 다섯 명은 모두 ‘도쿄제국대학’ 출신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교토제국대학 출신 오기야마 히데오가 22년 동안 ‘장기 집권’했는데,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도쿄제국대학 출신이 ‘독식’했음을 알 수 있다.

1877년 ‘도쿄대학’으로 출발, 1886년 ‘제국대학’으로 바뀐 도쿄제국대학은 제국 관료 양성의 성격이 강한데 반해, 1897년 설립된 교토제국대학은 이공계열을 중심으로 순수 학문 연구를 표방한 걸로 알려져 있다. 관장의 출신학교 성향이 두 도서관 운영에 어떤 차이를 가져왔을까.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의 운영과 제도를 그대로 이식했고, 조선총독부도서관은 분류표를 비롯하여 교토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참고한 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식민지 통치와 제국에 복무하는 도서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차이가 없었다(관련 기사 : 문과·이과 제도도 일제의 잔재였다니…).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사서관’으로 근무한 사람은 테라사와 치료(寺澤智了), 요시무라 사다요시(吉村定吉), 곤도 온이치로(近藤音三郞) 3명이다. ‘사서관’은 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만 있는 직제로, 일제 강점기 조선 땅에서 일한 사서관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근무한 3명뿐이다. 요시무라 사다요시는 조선도서관연구회 기관지인 <조선지도서관>(朝鮮之圖書館) 발간을 제안하고 1935년에는 조선도서관연구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직원록에서 확인 가능한 ‘사서’는 총 36명이며, 이중 조선인은 이긍종, 성달영, 이재욱, 박봉석 단 4명뿐이다. 일제 강점기 이 땅에는 도서관도 드물었지만 사서로 일한 사람은 더욱 ‘희귀’했음을 알 수 있다.

경성도서관을 건립해서 운영한 윤익선과 이범승은 어떻게 봐야 할까? 그들을 ‘사서’로 볼 수 있을까? 그들 역시 도서관 업무에 깊숙이 관여했을 테지만, 그들은 ‘최초의 사서’라기보다 조선인 ‘최초의 도서관장’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지방 관서에서는 경성부에 이긍종과 성달영을 포함해 9명의 사서가 이름을 올렸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사서가 더욱 귀했다. 1935년에는 부립인천도서관에 이시키 카즈미(一色克己), 평양부립도서관에 이시다 오사무(石田修), 1936년에는 부립개성도서관에 마치 노리요시(町則義), 청진부립도서관에 모리타 카츠미(森田克己)가 사서로 이름을 남겼다. 이들은 해당 도서관 관장이 되어 1939년 조선도서관연맹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인 사서와 조선인이 운영한 도서관 역사도 챙기기 어려운 마당에, 우리가 일본인 사서까지 알아야 할까? 식민지 조선의 도서관을 주도적으로 운영한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추적하지 않고는 식민지 시대 조선 도서관의 ‘전모’와 대한민국 도서관의 ‘뿌리’를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사서 자격증’ 1호 발급자는?
 

 
1945년 해방 후 한동안은 ‘사서’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도서원’, ‘부도서원’ 같은 명칭을 썼다. 미군정 시대 미국에서 쓰인 librarian – library assistant를 그대로 직역해서 도서원 – 부도서원 명칭을 썼던 모양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이식된 사서 명칭을 썼는데, 미군정으로 정치권력이 바뀌면서 수십 년 동안 쓰던 직업명이 한순간에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1월 18일 조선도서관협회는 정부에 첫 건의서를 제출하는데, ‘도서원과 부도서원이라는 명칭을 일제 강점기부터 쓰던 사서관, 사서로 각각 개정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사서’라는 명칭은 해방과 함께 더 이상 쓰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사서 자격증을 발급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조재순에 따르면 1966년 2월 2일 ‘준사서’ 1호로 등록한 이규동이다. 우리나라 사서 자격증 1호 발급자인 이규동은 ‘원암 이규동’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경성제이고보(지금의 경복고등학교)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다.

이규동은 대륜중학교 교장을 거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교수를 지냈다. 언어학자인 그는 1953년 5월 28일부터 1958년 6월 13일까지 경북대학교 초대 도서관장을 지냈고, 1955년부터 1959년까지 한국도서관협회 이사를 맡기도 했다.

뿌리가 같은 한국과 일본 도서관은 언제부터 달라졌을까
 

 
‘정사서’ 자격증 발급 1호는 이종문이다. 국립도서관 출신으로 당시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장이던 이종문은 1966년 5월 23일 정사서 자격증 발급 때 1호로 이름을 올렸다. 정사서 자격증 2호 발급자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오랫동안 사서로 일하고 <한국도서관사연구>를 쓴 백린이다.

이종문, 백린과 함께 이 날 사서 자격증을 발급받은 사람은 191명이다. 리재철, 장일세, 박희영, 천혜봉 같은 초기 도서관계를 이끈 원로의 이름이 10번 안에 줄줄이 보이는데, 10번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1965년 구성된 한국도서관협회 8대 임원진이다. 

사서 자격증 1호 이종문은 국립도서관 시절인 1958년 권영희와 함께 피바디(Peabody)대학 도서관학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종문은 국립도서관과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장을 거쳐 제약회사 종근당 전무이사로 근무했다. 도서관인이 기업 임원으로 곧장 옮겨 갔는데, 이종문은 종근당 창업자 이종근의 막내동생이다. 이종문은 훗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암벡스 회장으로 자신이 번 재산을 사회에 기부해서 유명해진 그는 드물게 만나는 ‘사서 출신 기업인’이다. 2017년 ‘운전사 갑질’로 뉴스에 오르내린 종근당 이장한 현 회장은 창업자 이종근의 장남이며, 이종문 암벡스 회장의 조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이 미국에 ‘도서관 연구조사단’을 파견한 것이 1959년이었다는 점이다. 국립도서관이 이종문과 권영희를 미국으로 도서관 유학 보낸 시점(1958년)과 거의 일치한다. 이종문과 권영희 외에 연세대학교 이명근, 이한용, 명재휘, 박영자, 서울대학교 유영현, 고려대학교 장일세가 비슷한 시기에 피바디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른바 ‘칸막이 열람실’ 위주로 도서관을 운영한 건 한국과 일본 모두 차이가 없었다. 좌석을 차지하려고 도서관 앞에 줄을 서는 풍경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한 풍경이었다. 1959년 일본의 도서관 연구조사단은 미국 도서관의 ‘대출 규모’에 큰 충격을 받고, 귀국한 후 일본 도서관을 학습 공간이 아닌 대출과 참고봉사 위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똑같이 미국에 도서관 연수를 다녀왔는데, 우리 도서관 관계자는 뭘 보고 온 걸까.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할 건 ‘외면’하고 청산할 잔재만 ‘계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도서관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칸막이 열람실’을 운영하고 있다.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독서실’을 운영하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사서로 일했으되 기록으로 남지 않은 그들
 

 
‘사서 자격증’은 어디서 발급할까? 도서관법과 시행령에 의해 사서 자격증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위탁을 받아 한국도서관협회에서 발급한다. 

한국도서관협회에 따르면 1966년 이후부터 2019년 6월 30일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사서 자격증’을 발급받은 사람은 1급 정사서 2756명, 2급 정사서 5만7782명, 준사서 3만3262명으로 총 9만3800명이다.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단 4명이었던 한국인 사서 수는 해방 이후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 땅에서 ‘사서’가 최초로 일한 장소는 어디일까? 기록으로 보면 사서 직함을 단 사람(우에스기 나오사부로와 시부에 케이조)이 최초로 일한 공간은 명동 시절의 경성부립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이며, 최초의 ‘조선인 사서'(이긍종)가 일한 장소는 탑골공원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지금의 종로도서관)이다. 

가장 많은 사서가 거쳐간 곳은 소공동 조선총독부도서관(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재욱과 박봉석을 포함, 12명의 사서가 이름을 올렸다. 그 다음은 동숭동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지금의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11명의 사서가 거쳐갔다.

사서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식민지 도서관에서 ‘촉탁’과 ‘고원’으로 일한 조선인들이 있었다. 1920년 윤익선이 문을 연 취운정 경성도서관과 1921년 이범승이 문을 연 탑골공원 경성도서관에도 ‘사서’ 역할을 한 조선인이 있었을 것이다.

‘사서’로 일했으되 기록으로 남지 않은 그들의 이름을, 안타깝지만 우리는 알지 못한다. 

[경성부립도서관 옛터]

– 주소 : 서울시 중구 명동 2가 25번지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 옛터]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종로 99 탑골공원
– 이용시간 : 24시간 개방
– 휴관일 : 없음
– 이용자격 : 이용 제한 없음, 무료
– 전화 :  02-731-0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