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엄청 가고 싶었는데"… '여공' 엄마는 수석졸업생이었다

 

 
가냘픈 선에 결연한 눈빛, 사진 속 엄마는 뭔가를 다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시절 영선씨(가명)는 무엇을 원하고 꿈꿨을까. 낮에는 공장에서 실을 잇고, 밤에는 꾸벅꾸벅 졸며 공부하던 영선씨의 10대 시절 이야기를 들어봤다.

“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이면/ 하얀 공장 하얀 불빛 새하얀 얼굴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공장엔 작업등이 밤새 비추고…”
– 노찾사, <사계> 중에서

1971년 10월, 열여섯 살 영선씨는 마산시 석전동에 있는 모직회사 ‘건강모방’에 취직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들이 하나둘 일터로 향할 때였다. 건강모방에서는 주야간 2교대로 낮에는 13시간, 밤에는 11시간씩 기계를 돌렸다. 영선씨는 그곳에서 기계를 보고 있다가 실이 떨어지면 이어주는 일을 했다. 온종일 서서 기계만 바라봐야 했다.

수틀리면 욕부터 해대는 과장을 견디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 과장은 국민학교까지 나온 나이 많은 언니들만 골라 욕을 해댔다. 해가 뜨는지 지는지 계절이 가는지도 모르고, 기계 돌아가는 것만 보며 밥 먹듯이 욕먹던 그 언니들은 얼마나 서러웠을까. 영선씨도 선배들이 모욕당하는 걸 보면서 가슴이 섬찟섬찟했으리라.

캄캄한 밤이 되면, 영선씨의 아버지는 늘 마중을 나왔다. 가로등도 없던 시절, 석유로 불을 밝히는 ‘호야불’로 들고서 철길을 건너 딸을 기다렸다. 하루 평균 12시간씩 일하며 누렇게 떠가는 딸의 얼굴을 보며 그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두 달 뒤, 영선씨가 다른 공장으로 옮겨가게 된 것은 아버지 덕이었다. 마산수출자유지구가 조성되고나자 관리청에서는 채용공고를 모아 각 가정에 엽서로 알렸다. 이걸 본 영선씨의 아버지는 직접 딸 손을 붙잡고 길을 나섰다. 찾아간 곳은 ‘에프원(Fone)’이라는 일본계 섬유기업이었다.

면접을 본 일본인 사장은 영선씨를 보더니 키가 작은 걸 보니 중학교도 나오지 않은 것 같다며 퇴짜를 놓으려 했다. 반에서 키순으로 서면 늘 1번이었던 영선씨는 그전에도 한일합섬에서 키가 작다는 이유로 떨어진 터였다. 그때 영선씨의 아버지가 나섰다. 일제시대에 학교를 다녀서 편지도 쓸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했던 아버지는 조목조목 설명을 했다. 당장 다음날부터 출근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있었던 일본기업의 근무조건은 국내 기업에 비해 월등히 좋았다.

한일합섬보다 대우가 더 좋았던 일본기업

“내가 엄청 대우받고 다녔다. 일본사람이 잔업은 절대 2시간 이상 안 시켜. 수당도 다 쳐준다. 9시부터 6시까지 딱 8시간 일 시키고, 점심시간 1시간 주더라. 3시 되면 간식으로 빵, 우유 주고. 잔업할 때 밥 당연히 주고. 다른 한국 공장에 비해서 돈도 많이 주고 근로기준법도 잘 지키대. 내 친구들은 한일합섬에 많이 다녔다. 거기는 8시간씩 3교대, 야간에도 돌리고, 365일 안 논다. 일본이 확실히 선진국이라, 선진국.”

일손이 시급했던 공장에서는 노동자의 인맥을 통해 노동력을 알음알음 충원했다. A가 고향 친구 B를 소개하면, B가 또 다른 친구 C를 소개하는 식이었다. 영선씨 역시 여동생 영순씨를 비롯해 고향 친구 넷을 줄줄이 에프원에 취직시켰다.

“한날 우리 집에 가니까 신발이 엄청 많이 있어. 누가 왔노 했는데 우리 고향 동네 애들 다섯 명이 다 내려왔어. 취직한다고 다 내려온 거라. 전부 하나둘씩 데려오는데 나는 다섯 명이 와버렸어. 다는 취업을 못 시켜, 그래가지고 중학교 나온 애를 떨어뜨렸다 아이가. 부장이 일부러 중학교 나온 사람을 떨어뜨린 거야. 그 애는 다른 데 가서도 일하기 좋으니까. 그래서 내가 에프원에 네 명을 취직을 시켰다 아이가. 내가 제일 많이 데려왔어.”

이런 식으로 마산은 인근의 여성노동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그 결과, 78년 마산수출자유지구 내 노동자의 여남 성비는 7.5 대 2.5까지 치솟았다.(*) 이들은 대개 저임금 노동자였다. 한 연구에 따르면 86년 마산수출자유지역 내 여성 일자리가 가장 많았던 전자산업의 경우, 남성 노동자가 여성 노동자에 비해 2.73배 더 많은 임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자가 4000원 받을 때 남자는 약 1만 1000원을 받았다는 얘기다. 무엇을 근거로 여성노동자에게만 그렇게 적은 돈을 주었을까. 그 무렵의 영선씨만 해도 노부모와 동생 셋을 먹여살린 실질적인 생계부양자였는데 말이다.
 

  
조장에서 대의원 투표까지, ‘오야붕’에 도전하다

그래도 영선씨는 나름 직장에 만족하면서 다녔다. 근무조건과 급여가 여타 다른 한국기업에 비해 좋은 편이었고, 출퇴근길이며 공장에서도 내내 고향 친구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미싱부에서 손바느질을 담당했던 영선씨는 특유의 부지런함을 바탕으로 일찌감치 ‘조장’을 달게 된다.

“소매 안감을 ‘소데우라(そでうら)’라 하거든. 그 안감만 손으로 꼬매는데, 손바느질을 ‘마도매’라 그래. 우리 조원이 20명인가 되는데 하루에 몇 개 하는지 앞에 나가서 적고 그랬어. 수량이야 알아서 하는 거지. 고마, 많이 하는 사람은 바늘땀이 넓고 적게 하는 사람은 꼼꼼하게 하고 그렇다. 바늘 떨어지면 바늘 주고, 실 주고.”

욕쟁이 과장이 여성노동자를 함부로 대하던 이전 직장에서는 숨도 한번 크게 못 쉬던 영선씨도 이곳에서는 어깨 펴고 일할 맛이 났다. 일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당시 마산자유무역지역에서 노동조합은 금지되었지만, 특정 규모 이상의 사업장에서는 노동자대표와 사측 대표가 만나 주요사항을 협의하도록 하는 노사협의회가 있었다. 영선씨는 조장 경력을 발판 삼아, 노동자 대의원에 도전한다.

“투표로 대의원을 정하는데 후보로 몇 명이 나왔다. 내가 거느린 게 60명이 된다 하대. 내하고 한 언니하고 딱 동표가 나온 기라. 그 언니는 나이도 네 살 더 많고 정규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그 언니가 얼마나 창피스럽노. 나는 어리고 중학교밖에 안 나왔는데. 소문이 쫙 났는데 우리가 투표가 제일 재밌었다네.”

영선씨는 신이 나서 말했다. 중졸인 자신이, 고졸 출신을 이겼다는 게 그렇게 좋았을까. 어쩌면 그 투표는 학벌을 둘러싼 여성노동자들의 한판 자존심 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영선씨는 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고등학교 나온 언니들이 똘똘 뭉쳐 영선씨를 몰아내기 위해 뒤에서 부단히 ‘공작’을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부장의 비호로 이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영선씨는 최연소 대의원으로서 사장 및 임원진들과 한 테이블에 앉게 된다.

일본기업 상대로 데모를 했으니 “우리가 애국자”

에프원에 대한 영선씨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노동법을 잘 지키는 ‘선진국’ 일본에 대한 동경이 있고, 한편에는 식민 지배를 했던 뻔뻔한 ‘전범 국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있다. 대의원이 된 이후로는 이 적개심을 동력 삼아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집회에도 나섰다.

“우리도 에프원 다닐 때 일본 회사라고 돈 좀 더 받으려고 데모도 하고 설쳤다. 한국에서 돈을 벌었으면 한국에서 좀 쓰든가 종업원 처우 개선을 해주거나 월급 많이 주던가 하지, 왜 돈을 일본 즈그가 다 가져가노 이거야. 이익금을 왜 다 빼돌리노. 돈 못 가져가게 우리가 가로막는 거야. 우리가 애국자지.”

“엄마는 그래놓고 나는 촛불집회도 못 나가게 했던 거야? 하하.”

“아이고, 그거는 외국인 상대로 하는 건데!”

영선씨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집회에 나가면서도,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로서의 주체성보다는 일본에 빼앗긴 몫을 주장하는 애국 활동으로 이를 이해했던 듯하다. 하지만 경찰의 눈에는 다 같은 시위대일 뿐이다.

“한날은 데모를 하는데, 대의원이 조를 대표해야 되니까 내가 마산 야구장 주위에 걸어가니까 경찰이 내를 딱 잡는 기라. 구호 그런 것도 없었어. 띠도 안 두르고 피켓도 안 들고 시위 시작도 안 했는데 다 흩어지고 난리가 났지. 내가 딱 잡혀서 파출소로 연행되는데, 내가 자분자분 떨어사니까 그 사람들 보기에 이거 아무것도 아니거든. 내보고 가라고 하대. 그래 집에 왔다.”

그날 집회에 함께 참석했던 사람 중 노사협의회 대의원 위원장이었던 남자는 회사에서 쫓겨났고, 또 다른 대의원 언니 역시 회사에서 나가야만 했다. 영선씨는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 따라갔지. 수출자유지구 못 다닐 뻔했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임금반발 조업거부 잇달아 마산수출자유지역
(동아일보 1975년 3월 21일자)

마산수출자유지역 입주업체들이 생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주고 있는데 반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조업거부농성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으며 이달 들어 3개사의 남녀종업원 3천명이 조업을 거부했다.
지난 5일 한국 스와니 주식회사 남녀종업원 4백여 명이 공장으로 출근 않고 마산공설운동장에 모여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인 것을 비롯, 11일 오전 9시 동광주식회사 여공 1천 6백여명은 임금의 40%인상을 요구하면서 이틀 동안 작업을 거부했다. 또 20일 한국 리알톤 남녀종업원 1천여 명은 공장에서 처우개선을 요구하고 조업을 거부했다.
입주업체 종업원들의 잇단 농성과 조업거부사태는 경영주 측에서 물가상승율을 감안 않고 월 1만 8천원 꼴의 생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주고 있고 그나마 인상해준 임금이 고작 10% 안팎이어서 큰 반발을 산 데 원인이 있다. 이 같은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노동청이 개입, 수출부진을 핑계로 임금인상을 기피하는 경영주와 따져 해결을 짓고 있는데 노동조합결성이 법적으로 금지되고 있는 수출자유지역종업원들은 대안으로 설치된 각 업체별 노사협의회조차 경영주 측에서 어용화하거나 사실상 기능을 정지시켜 그들의 건의사항을 전달할 길 없어 조업거부 농성 등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열 시만 되면 꾸벅꾸벅 졸던 방통고 수업

1975년, 영선씨는 에프원에 다니면서 방송통신고에 입학했다. 매일 저녁 KBS 라디오에서 선생님들의 강의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펜을 꼭 쥐고 집중해보려 해도, 노동의 피곤함과 식곤증이 합쳐지면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정신 차려보면 열 시 반, 방송은 끝나 있었다.

2주에 한 번은 인근 고등학교에 출석해서 선생님들로부터 직접 수업을 받았다. 방송으로 들은 내용을 복습하는 자리였다. 당시 방송통신고에 다니는 이들 중에는 직장인이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74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현직 교원을 비롯해 가정주부, 공무원, 회사원, 신문배달원, 기능공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참여한 생생한 수업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안양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최인옥 양은 그 전날 밤 삼부교대제의 야간 근무를 아침 7시에 끝내고 바로 등교했다. 충북 제천의 김인순 양은 토요일마다 중앙선 밤기차를 타고 올라와 그 다음날 출석 수업에 참석하고 있다. 삼십대 중반의 한 가정주부는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함께 학교로 나오기도 했다. 어떤 학교에선 스님학생이 승복차림 그대로 체육훈련에 참가하는 모습도 보였다.”

 

74년 방송통신고가 설치된 첫해만 하더라도 서울과 부산의 11개 공립학교에서만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타 지역 학생들이 밤 기차를 타고 상경해야 했던 이유다. 그러던 것이 75년 방송통신고는 14개 시의 36개 학교로 확대 설치되었다. 영선씨는 마산여고에 부설로 방송통신고교가 개설되자마자 1회생으로 입학했던 것이다.

교대 가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앨범에서 오래된 ‘학사요람’을 발견했다. 79년, 선생님들이 직접 자를 대고 그어 만든 졸업장 속에 영선씨의 이름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우등상과 교육감상 모두 영선씨의 것이었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기억을 더듬으며 영선씨는 얼굴이 잠시 환해졌다.
 

 

“내가 마산통신고등학교 수석으로 졸업했다 아이가, 수석! 경남매일신문에 났다 하대. 우리 큰오빠가 봤다 하던데, 나는 못 봤다. 나는 1등 해서 교육감상 받고, 2등 한 애는 학교 선생 됐을 거다. 여기 성적표에 안 나와 있나.”

다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진주교대 갔던 친구처럼, 영선씨도 교대 가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79년도까지 교대가 2년제였던 시절이라 졸업도 빨리 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집 사정을 고려해서 입 밖으로 말도 꺼내보지 못했다며 내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이런저런 질문을 보탰다.

“엄마는 왜 대학가고 싶다는 말을 안 했어? 막내 외삼촌은 그때 대학 다 마쳤을 때잖아.”

“오빠들이 한 번에 다 군대 가버려서, 내가 벌어먹고 살았잖아.”

“아, 엄마가 대학 가면 집에 돈 벌 사람이 없어서?”

“내 졸업할 당시에는 오빠들이 제대한 뒤였다. 그때는 내가 대학을 가도 되는데, 집에서 가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엄청 가고는 싶었는데, 형편이 그래서 말할 그게 못 됐지.”

결국 영선씨는 수석 졸업을 하고도, 집에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대학 진학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다. 나는 안다. 엄마는 간절히 원할수록 더 눈치를 살피고, 더 말을 아끼는 사람이다. 위에 언니는 초졸에, 여동생 둘도 중학교까지만 졸업을 했다. 그런 맥락에서는 영선씨가 방송통신고를 졸업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비록 오빠들은 정규 고등학교 졸업에, 남동생은 대학도 나왔지만 말이다.

만약 영선씨가 남자로 태어났어도 속으로 말도 못하고 그런 고민을 속으로 삭혔을까. 교육열이 그렇게도 높았다던 할아버지는 왜 성적표를 보고 아무 말 하지 않았을까. 넉넉지 않은 형편에 여자 치고 그만큼 공부했으면 됐다는, 그런 맥락 때문은 아니었을까.

“내가 항상 말 안 하드나. 어떤 이유가 있어도 니는 대학을 가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니까. 집 생각하지 말고, 죽든가 살든가 내가 대학을 가라고 안 하드나. 그게 뼈 있는 말이다. 내가 그래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야.”

나는 이 대목에서 울컥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무방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지금껏 내가 잘나서 대학을 나왔다고 생각해왔다. 엄마는 등록금 한 번, 생활비 한 푼 대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결국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선택을 엄마가 전폭적으로 지지해줬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을 간다고 했을 때, 엄마 지인들은 지금 상황에 같이 일해야지, 무슨 대학을 보내냐며 말렸다고 한다. 이혼하고 혼자 자식 둘 뒷바라지하느라 힘든 걸 뻔히 알아서들 하는 소리였다. 

가난은 모두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과거, 우선권은 남자 형제에게 돌아갔다. 남자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남자라서 학교에 보내준 것이다. 엄마는 그 공식을 뒤집었다. 딸인 나는 대학을 나왔지만, 아들은 졸업하지 못했다.

엄마가 누구를 밀어주거나, 응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좀 더 간절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고, 그러려면 대학 졸업장이 반드시 필요했다. 비록 정식 기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지금 이렇게 시민기자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엄마 덕분이다.

영선씨는 내가 끝까지 가볼 수 있도록 언제나 뒤에서 믿고 바라봐줬다. 딸이라고 어떤 한계도 긋지 않았다. 31년을 넘어 다른 선택을 해준 엄마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텀블벅에서 이 인터뷰를 엮어낸 책 <나는 엄마가 먹여살렸는데> 펀딩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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