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받는 '페이'가 교묘한 이유

우리는 모두 말 속에서 산다. 아무리 나 같은 백수라도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드물다. 하다못해 친구와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 받거나, 고장난 정수기 수리를 신청하기 위해 전화 속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 자음과 모음, 단어와 문장 사이를 유영하는 것이 삶이다. 그 가운데서도 무언가를 정의하는 ‘단어’란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다. ‘맘충’이란 단어 하나로 불특정 다수의 아이 엄마들이 속앓이 하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다. 

사례가 하나 더 있다. 최근 ‘근로’ 대신 ‘노동’이라는 말이 두루 쓰인다. 근로라는 두 글자에 묻어있는 유신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한 움직임이다. 심지어 지난해 정부가 ‘근로’라는 단어를 ‘노동’으로 대치하는 헌법개정안을 제출했다. 이 두 단어는 비슷한 듯 다르다. 5월 1일을 가리키는 말도 두 가지다. ‘근로자의 날’과 ‘노동절’, 같은 날을 뜻하는 말이지만 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것이 바로 단어의 힘이다. 

방송작가로 수년간 살면서 늘 하나의 단어가 궁금했다. 급여를 논할 때 늘 연봉이나 월급이 아닌 ‘페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꼭 무슨 불문율 같았다. 작가 선배도, 피디 선배도 모두 페이라는 단어를 썼다.

“페이는 얼마로 책정됐니?”
“막내작가 페이는 OOO 정도란다.”

연봉도 있고 월급도 있을 텐데 왜 ‘페이’라는 단어만 사용하는 걸까 궁금했다. 후에는 하도 많이 들어서 그 단어 자체는 익숙해졌지만, 늘 마음 한 구석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섭외가 하도 안 되어서 동동거리며 전화를 돌려대던 어느 날, 두세 시간을 전화통에 매달려 있다가 겨우 어렵게 인터뷰 허락을 받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사무실 전화기를 내려놓다가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왜 ‘페이’라는 단어가 이질적이었는지. 밥 씹다 모래 씹을 때처럼 유독 그 단어가 잘 삼켜지질 않았는지. 내가 노동자인데 노동자가 아니라서 그런 거였다. 노동자인데 노동자가 아니라니, 이 무슨 말장난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내 월급은 왜 페이일까
 

방송작가들은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회사대 노동자로 계약을 하지 않는다.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근로계약서를 쓰더라도 프리랜서 신분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월급을 받는 대부분의 회사원들이 해마다 하는 연말정산 대신 개인사업자로 분류되어 5월에 종합소득세 정산을 한다. 사업자번호도 없는데 개인사업자가 되는 아이러니다. 그래서 월급이라는 단어가 맞지 않는 거였다. 맙소사, 안개 자욱하던 머리가 번뜩하더니 정리가 된다. 그래서 페이였구나! 

문제는 대부분의 방송작가들이 방송국에 상주하며 근무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지켜야 하며 야근도 하고 간혹 출장까지 다닌다. 지난 4월,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전국 방송작가 580명을 상대로 실태조사를 진행한 결과 본인이 프리랜서 형태로 고용되어 있지만 상근한다는 대답이 72%였다.

비단 방송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습지 교사와 요구르트 판매원, 간병인, 퀵서비스 기사, 트레일러 기사, 대리운전 기사… 이들 직군 역시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특수고용 노동자’라는 낯선 위치에 놓인다. 의무는 노동자와 똑같지만, 권리는 흐릿하다. 
 

  
‘페이’가 교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페이라는 단어 안에는 야근수당이 없다. 휴가비도 교통비도 식비도 없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들이 이 단어로 인해 지워진다.

방송작가들은 밤샘 야근을 하고도 청구할 곳이 없다. ‘건’ 당 얼마의 페이를 받는, 야근수당을 약속받지 못한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돌이켜보니 ‘페이’란 참 얼마나 편리한 단어인지. 

그래서, 방송작가들은 홍길동도 아닌데 월급을 월급이라 부르지 못한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백수가 말한다. 우리를 사업장 없는 개인사업자로 만들지 말라.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로 만들지 말라. 우리에게 ‘호월호급’을 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