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처음으로 몸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약속 시각은 토요일 오전 10시였다. 장소는 이태원. 여자 둘이 만나서 브런치를 먹으러 갈 법한 시간이지만 우리는 춤을 추기로 했다. 친구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짓수 도장에서 만난 이 친구는 매우 기민하게 움직일 줄 알아서 나는 그와 스파링을 할 때마다 번번이 그의 주특기인 암록(Armlock, 상대방의 팔을 걸어서 꼼짝 못 하게 하는 기술)으로 제압당하곤 했다. 반면에 나는 가능하면 온종일 누워있고 싶었다. 그 무렵엔 특히 그랬다. 

<운동하는 여자>가 출간되고 사람들은 나를 매우 활달한 운동광으로 여기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운동보다 누워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도 누워있기에 가장 좋은 주말 아침을 포기한 것은 즉흥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즉흥적으로 추는 춤을 어떻게 배우는지, 그 춤이 정말 치유의 효과가 있는지 궁금했다. 

스튜디오 안은 볕이 잘 들고 적당히 따뜻했다. 사방이 텅 비었고 한쪽 구석엔 실험실에서나 볼 법한 해골 모형이 서 있었다. 나와 친구를 포함해서 대여섯 명이 한곳에 모였다. 

‘즉흥춤이라도 일단은 춤이니까 스텝부터 배우겠지?’

시작은 뜻밖에도 나무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눕는 게 좋아도 낯선 곳에 와서 갑자기 누우려니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뻣뻣하게 누워서 양손은 깍지를 낀 채로 가슴 위에 올려놨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일어나 앉으라는 지시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수업은 계속 누운 채로 진행됐다. 더군다나 알려주는 동작들은 어떻게 봐도 춤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워서 호흡을 깊게 마시고 뱉는 동시에 목과 허리, 골반, 팔다리를 느리고 단순하게, 반복적으로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방금 느낀 자극을 다시 떠올리고 평가하는 절차가 빠지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멘트가 이어진다. ‘무릎과 종아리, 발목이 움직이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라’, ‘골반이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 나는가?’, ‘몸의 구조가 더 열린 것 같은가?’ 

딱딱한 바닥이 침대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요가와 기체조 사이, 그 어디쯤에 속할 법한 동작을 열심히 따라했다. 하지만 동작이 하나같이 쉽고 단조로워서 스트레칭의 효과조차 느낄 수 없었다. 대체 춤은 언제 추는 거지? 이대로 잠드는 게 아닌가? 이런 거라면 집에 혼자 누워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의구심이 커지는 중에 다시 숨을 고르면서 반듯하게 누웠다.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긴장이 풀린 것이다. 발끝은 45도 각도로 바깥을 향했고 양손은 몸통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축 늘어졌다. 딱딱한 바닥이 내 방의 침대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게 누운 채로 몸의 여러 부위를 움직이다가 즉석에서 춤이 시작됐다. 내가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동작이 알고 보니 모두 춤이었다. 몸통과 팔다리가 서로 연결됨을 느끼며 앉았다가 일어서고 원을 돌았다.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왔다. 온몸이 하나로 연결된 느낌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가볍게 움직이면 그 동작들이 그대로 춤이 됐다. 

아마도 최초의 춤은 그렇게 자연스럽고 제멋대로인 동작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이태원으로 가는 내내 어려운 동작을 따라하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 멋쩍었다. 동작을 배우고 그대로 모방하는 것만이 운동이 아닌데. 소마틱스(Somatics)라고 불리는 이 낯선 운동은 운동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소마(Soma)’란 헬라어로 ‘몸’을 뜻하고 소마틱스는 운동과 건강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는 새로운 운동법을 지칭한다. 소마틱스는 근육을 키우거나 심폐력과 지구력을 기르는 활동이 아니다. 그보다는 뇌를 깨우고 몸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움직임에 집중한다. 

소마틱스를 통해서 확실하게 깨달은 바는 내가 지금까지 눕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누우면 편했고 그래서 툭하면 드러누웠지만 한 시간 남짓한 수련을 마친 직후의 몸과 비교해 보니 평상시의 나는 누워서도 긴장한 상태였다.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 몸을 웅크린 채로 힘을 줬던 것 같다. 

몸과 화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

정신과 몸의 불일치, 대치 상태, 몸이 타자화된 순간 우리는 긴장한다. 긴장의 주된 원인은 스트레스다. <운동하는 여자>를 출간하느라 정신력을 쏟아부었고 그만큼 지쳐 있었다. 힘으로 다른 사람을 제압해야 한다는 강박 또한 긴장을 불렀다. 요령이 부족한 주짓수 초보는 힘과 기술을 함께 이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두 가지를 적절히 병행하지 못해서 오직 기운만 썼다. 

더 근본적으로는, 몸을 혹사하는 것을 너무 당연시했다. 갑자기 몸이 아프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화부터 났던 것도 그래서였다. 반대로 아프지 않을 때는 무릎이나 종아리, 골반과 관절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것들은 늘 거기에 있고 멀쩡하게 움직이니까. 

그러면서도 잘못된 습관은 모두 몸의 탓으로 여겼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해로운 음식을 욕망하는 주체가 몸이라고 믿었다. 몸의 사악한 유혹이 끊이지 않았고 그에 맞서서 싸웠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말이다.

나쁜 자세로 허리를 혹사하고 잠들기 직전까지 스마트폰에 정신을 팔고 밤 늦게 음식을 먹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약해진 몸이 그렇게라도 보상을 해달라고 아우성을 치니까. 여기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이어트와 꾸밈까지 수행하며 나는 몸을 더욱 외로운 처지로 내몰았다. 몸이 욕망하는 대로 했다고 여겼던 그 많은 일들이 사실은 몸을 상대로 일삼았던 폭력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마틱스에 관한 책을 찾아보면 정신적인 소모가 심한 창작자나 예술가, 또는 몸을 혹사하는 운동선수의 고해성사가 이어진다. 이들은 극심한 통증을 치료할 목적으로 소마틱스를 접하는데 예를 들면 척추측만증과 같은 질병으로 몸이 심각하게 망가지고 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련에 임하는 것이다. 

몸과 나의 거리를 좁히고 화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였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몸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내가 대화하는 법을 모르고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것과 반대로 몸은 늘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대화가 가능했다(심지어 그것은 어렵지도 않다). 그날은 몸과 정신이 모두 완벽하게 이완된 상태에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