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 가볍게 다녀올 곳 어디 없을까

산책과 등산 그리고 역사탐방 최적의 장소로 국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는 곳이 있다. 바로 남한산성이다. 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 하남, 성남시와 접한 공간에 있다. 서울 근교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도 좋다. 거기다 201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남한산성의 명암
 
남한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활용해 성곽을 쌓고 거기다 방어시설까지 구축해 놓은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성을 쌓는 기술인 축성술의 발달 단계와 무기체계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기다 지금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 살아있는 유산으로의 가치가 높다고 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반면에 남한산성에는 우리 민족사에 되새기고 싶지 않은 아픔의 역사가 담겨있다. 조선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한겨울, 남한산성은 절대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청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다. 인조는 여기서 47일 동안 청군에 맞서 결사 항전을 계속하지만 결국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그때가 1637년 1월 30일이다. 그 결과 왕자들과 많은 신하들이 청에 인질로 붙잡혀 가서 고초를 겪었다.
 
남한산성 제1코스 탐방
 
훌륭한 문화유산과 아픈 역사를 함께 가슴에 새기고 남한산성 제1코스 탐방에 나섰다. 탐방코스는 산성로터리를 출발해 북문과 서문을 거쳐 수어장대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남문으로 내려오는 3.8km 코스이다.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접근하기 제일 쉬운 코스이다. 산책 삼아 다니면 약 1시간 반이 소요된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4개의 문이 있다. 닭백숙 음식점으로 유명한 산성로터리를 출발하여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북문이 보인다.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군과 맞서 싸웠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한 곳이다.
 
북문을 전승문(全勝門)이라고도 한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승문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고 승리한다는 뜻인데 왜 참패한 곳에 전승문이라 부르는지 궁금했다. 이는 그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북문을 빠져나가 보면 바로 앞에 등산로가 보이고 성곽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높게 쌓은 성벽을 바라보니 그때 당시에 현대화된 장비도 없이 순수한 사람 인력으로 어떻게 저리 높게 쌓았는지 궁금했다.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주장성을 기초로 하여 조금씩 증축돼 오늘에 이르렀지만, 그때 당시 동원되어 고생한 백성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연해진다.
 
남한산성에는 요즘도 복원과 정비를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그래서 주변에 공사 자재 등이 놓여있어 조금은 지저분해 보인다. 그러나 완벽한 모습의 남한산성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 불편한 점은 있었지만 탐방이 더 즐겁고 발걸음 또한 더 가벼워졌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담장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을 총안(銃眼)이라고 하는데, 이는 적을 향해 총을 쏠 때 사용한다. 그리고 여장(女墻) 사이사이에 있는 긴 홈은 몸을 숨기며 화살을 쏠 때 사용했다고 한다. 여장(女墻)은 성벽 위에 설치하는 낮은 담장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구조물을 말한다.
 
북문을 지나 서문으로 가다 보면 울창한 산림을 볼 수 있다. 이는 마을 주민들이 남한산성의 귀중한 산림을 지켜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금림조합’을 만들어 도벌을 막은 덕분이라고 한다. 산책로 중간중간 이곳에서 나온 폐목을 활용해 통나무 의자도 만들어 놓았다. 거기에다 설치 년, 월, 일을 아라비아 숫자로 새겨 놓아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주변 경관을 보다 보면 금방 서문에 도착한다. 북문에서 걸어가다 보니 조금 가깝다는 느낌도 들었다. 서문을 우익문(右翼門)이라고도 부르는데,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곳에서 47일 동안 청나라 군과 싸우며 버티다가 청나라 황제 칸에게 항복을 했다. 인조는 세자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며,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로 땅을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모욕을 당한다.
 
요즘은 서문에 올라와서 보면 현대화된 서울의 모습과 잠실롯데타워가 보이고, 한창 개발 중인 위례신도시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특히 야간에는 사진동호회 회원들이 서울 야경을 촬영하기 위해 많이 모이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서문을 지나면 병자호란 당시 이시백 장군이 총지휘하던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가 보인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문과 남문 사이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휘소 겸 적의 동태를 살피는 감시시설이다.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將臺) 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남한산성의 정상부에 위치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휴식을 취하며 주변 경관을 즐긴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현재는 수어장대 오른쪽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호각을 지어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수어장대 옆에는 청량당이 있다.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李晦)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이 소식을 잔해들은 부인도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고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튼튼하고 잘 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리고 있다. 이곳은 맑고 서늘하다 하여 청량산(淸凉山)이라 불린다.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수어장대에서 아래로 계속 내려가다 보면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남문(지하문)이 보인다. 특히 남문은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들어올 때 이문을 통과해서 들어왔던 곳이다.
 
사적 제480호, 남한산성 행궁
 
행궁(行宮)이란 왕이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사용했던 별궁을 말한다. 한남루 정문을 지나면 왼쪽에 조선시대 때 사용하던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와 중포(中砲) 등 각종 무기류들이 전시돼 있다.
 

   
행궁의 주요 건물들 중 외행전은 왕이 신하들과 정치를 논한 장소로 사용됐던 곳이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장소로도 사용됐다. 그리고 바로 위에 있는 내행전은 왕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공간이다.
 
내행전의 북쪽에 위치한 좌승당은 광주부 유수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좌승(坐勝)이란 앉아서 계책을 만들어 반드시 전쟁에서 적을 물리치고 이긴다는 군사적 의지가 담겨있다. 그리고 순조 17년(1817) 광주부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이위정(以威亭)이란 정자가 좌승당 뒤편에 세워져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백색국가에서 제외하자 해외 대체 여행지로 요즘은 국내여행을 많이 다닌다. 가족, 연인들과 함께 산책과 등산을 겸한 역사탐방 장소로 서울 근교에 있는 남한산성을 권하고 싶다.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31
입장료 : 남한산성(무료), 행궁(어른 2천원)
주차요금(승용차) : 평일 3,000원, 주말 5,000원

* 참고자료: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